안희정(53)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재판부가 ‘피해자다움’ 편견에 빠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재판부는 수행비서였던 피해자의 업무 수행을 두고 ‘피해자답지 않다’고 판단해 피해자 증언을 불신했다. 반면 안 전 지사의 혐의 인정 번복은 판결문에 언급되지 않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재판장 조병구)는 지난 14일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안 전 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등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1심 판결문을 살펴본 결과 재판부는 피해자의 거부가 소극적이었고 사건 직후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을 주요 근거로 삼았다.

KTX·카카오택시 타고 신속 상경한 수행비서에 “피해자같지 않아”

“심야에 긴급히 KTX를 갈아타며 대전에서 서울로 가서 카카오블랙 택시를 불러 오피스텔 도착한 후, 뛰어서 로비로 들어가는 행동은 오피스텔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는 피해자 주장과 모순된다.”(마포 오피스텔 ‘4차 간음 사건’ 관련·판결문 71쪽)

재판부는 피해자가 안 전 지사 지시를 신속히 이행하려고 한 행동을 ‘피해자답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건 당일 대전에 내려간 피해자는 ‘서울 마포 오피스텔로 오라’고 지시한 안 전 지사에게 ‘바로 못 갈 것 같다’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안 전 지사는 ‘늦게라도 와라’고 재촉했고 피해자는 당일 심야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고 있다.ⓒ민중의소리
▲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고 있다.ⓒ민중의소리

피해자의 사건 전후 업무태도에 대한 재판부 의심은 판결문 전체에 걸쳐 있다. 재판부는 2017년 7월 러시아에서 첫 간음사건 후 피해자가 △안 전 지사의 입맛에 맞춰 ‘순두부식당’을 물색하고 △사건 발생 후 와인바에 통역인 부부, 안 전 지사와 동석했고 △사건 후 안 전 지사에게 존경심을 표한 점을 들며 피해자 증언을 배제했다.

재판부는 나아가 3차 간음사건인 ‘스위스호텔’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담배를 방문 앞에 두고 텔레그램으로 담배를 뒀다고 문자를 보내기만 했어도 업무는 지시대로 수행하되 간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 물었다. 안 전 지사 ‘담배’ 지시에 담배를 직접 전달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은 셈이다.

피해자는 당시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두려워했다. 피해자는 그럼에도 지시대로 담배를 전달했다. 재판부는 이를 “이전의 거절방법보다 더 명시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 태도가 모순이라고 판단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첫 사건부터 마지막 사건까지 ‘피해자라면 이러지 않는다’는 관점을 모든 일상에 적용해 일거수 일투족이 납득이 가지않는다고 판단했다”며 “피해자에겐 수행비서로서 원래 해야 하는 일이었고 다른 비서라도 했을 것이고 그 전부터 해온 업무였다”고 말했다.

‘순두부 식당 물색’은 특히 편향됐다는 지적이다. 피해자는 법정에서 재판부로부터 관련 질문을 한 차례도 받은 적이 없다. 안 전 지사 측 증인이 법정에서 밝힌 진술로, 피해자의 사건 당일 기억은 이와 다르다. 재판부는 피해자 입장을 듣지 않은 채 안 전 지사 증인의 증언을 채택했다.

“피해자 거부가 불충분했다”는 재판부

재판부는 피해자가 표시한 거부태도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평했다. 피해자는 최초 간음 사건 당시 ‘나를 안게’라고 한 안 전 지사 말에 고개를 숙인 채 가로저으며 ‘아니요’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이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절 의사 표현이었다”고 밝혔다.

▲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무죄 선고에 대한 여성단체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민중의소리
▲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무죄 선고에 대한 여성단체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민중의소리

재판부는 “피해자가 음주 등으로 정상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거나 업무로 인해 심각히 위축된 상태였다거나, 피해자가 방을 나가거나 안 전 지사 접근을 막는 손짓을 못할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관점은 4개 간음사건과 6개 추행사건에서 반복된다. 재판부는 2차 간음 당시 피해자가 ‘씻고 오라’는 안 전 지사에게 ‘용건 정도는 물어보고 갔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는 부르는데 따로 이유가 있는게 아니고, 항상 부르면 가야 한다”고 말한 피해자 진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논리는 재판부가 업무상 위력의 행사를 좁게 해석한데서 기인한다. 재판부는 ‘업무상 수직적·권력적 관계로 피해자 자유의사를 제압하기 충분한 수준의 위력이 있었다’고 인정한 동시에 ‘위력이 행사되거나 남용되진 않았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해 안 전 지사가 업무상 위력을 행사할 지위에 있지만 피해자에게 위력을 행사했다고 보진 않았다.

‘전국법전원젠더법학회연합회’는 지난 19일 성명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며 “기존 대법원 판시보다 엄격하게 해석한 근거에 대해 재판부는 합당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은 1998년 유치원 원장이 원장 신분을 이용해 유치원 교사 및 예비교사를 추행한 사건, 2004년 직장상사가 등 뒤에서 피해자 의사에 명백히 반해 어깨를 주무른 사건에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를 인정했다.

‘안희정 번복 태도’ 질문 대상 아니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복합적인 심리를 두고 ‘진술이 일관되지 않다’며 피해자 진술을 배척했다. 피해자는 간음 피해 직후 충남으로 이동하자는 안 전 지사 지시에 대해 ‘왜 이리 자기중심적이냐. 운전비서를 깨우겠다는 거냐’고 생각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재판부는 “성폭력을 당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여서 반항할 수조차 없었다는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봤다.

안 전 지사는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지난 3월6일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며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다. 모두 다 제 잘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안 전 지사는 법정에선 ‘애정관계에 의한 성관계’로 말을 바꿨다. 이 사건 1심에서 안 전 지사 신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공판을 꾸준히 방청한 김 부소장은 “재판부는 이와 관련해 안 전 지사 측을 추궁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 사건이 발생한 지난 2월 ‘마포 오피스텔’에서 안 전 지사는 피해자에게 ‘미투운동’을 언급했다. 피해자는 안 전 지사가 ‘내가 너한테 상처된 걸 알았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증언했다. 반면 안 전 지사는 ‘우리가 사랑을 한 것이 미투 운동의 대상이 되느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왜 성폭력을 뜻하는 ‘미투운동’이 언급됐는지 따져묻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피해자는 간음 당한 직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귀걸이를 다시 착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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