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지난해 이적표현물을 소장했다며 한 전자도서관 운영자를 구속수사해 ‘공안 탄압’ 비판을 샀던 가운데, 문제의 이적표현물을 경찰대학교 도서관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이 구속수사 증거로 활용한 이적표현물을 스스로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권미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행안위)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2018년 경찰대학 도서관 보유 도서 목록’엔 1989년 도서출판 녹두에서 발간된 ‘철학의 새로운 단계’와 1988년 태백편집부가 쓴 ‘북한의 사상’이 포함돼있다. 모두 주체사상을 다룬 사회철학서다.

▲ 경찰청.(자료사진) 사진=이우림 기자
▲ 경찰청.(자료사진) 사진=이우림 기자

경찰은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운영자인 이진영씨를 구속하며 두 도서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이씨는 사회주의 및 북한 관련 서적을 소장하고 온라인 게시 등을 통해 노동자의 책 회원 1300여 명과 자료를 공유했다. 서울경찰청 보안수사4대 소속 보안수사팀은 2016년 이씨가 이적표현물을 소장·배포했다며 자택을 압수수색했고 서적 129권을 이적표현물로 압수했다.

권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이씨의 압수 도서 목록에도 ‘철학의 새로운 단계’ 및 ‘북한의 사상’이 포함돼있다.

이씨는 이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으나 1·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2심 재판부는 “관련 증거를 봐도 이 사건 공소사실이 유죄로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두 도서는 중앙도서관, 대학도서관 등 공공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철학의 새로운 단계는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되며 북한의 사상 또한 서울대·부산대·서강대 등 대학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다.

▲ 북한의 사상(왼쪽)과 철학의 새로운 단계 표지.
▲ 북한의 사상(왼쪽)과 철학의 새로운 단계 표지.

권미혁 의원실 관계자는 25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경찰이 이적표현물 배포·소장 혐의로 수사한 사건이 2심까지 무죄 선고 받았다.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수십권이 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에도 있다는 점이 무죄사유가 됐는데 심지어 경찰대학 도서관에서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엉터리 심사를 하고 있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적표현물 판단 기준에 대해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기존 판례로 인정된 이적성 기준을 따른다. 별도 심의위원회는 없다”며 “특별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 민간 기관에 감정을 의뢰한다. 그런 기관이 3~4곳이 있으나 기관명을 공개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이와 관련 경찰개혁위원회 권고를 수용해, 공인된 학회 등과 협의해 2018년 내로 이적표현물 감정·심의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이다. 경찰개혁위는 “보안 경찰은 시대착오적이며 구태의연한 활동을 반복하면 안 된다”며 이적표현물 감정·심의 절차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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