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더위가 본격 시작된 지난 12일 오후, 서울 양천구 용왕산 아래 양화초등학교 앞. 수업 마친 아이들이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다. 1학년 여자 아이 둘이 더위를 피해 “이모 안녕하세요~” 하며 들어오는데 딱 봐도 단골손님이다.

12년차 방송작가이자 숲해설가인 김혜정씨가 3개월 전 문을 연 생태 문학 서점 & 식물가게 ‘꽃피는 책’. 이곳을 찾는 어린 손님들은 각자 편한 자리를 잡고 앉아 생태동화책을 읽고 꽃 화분에 물 주고, 주인 이모가 모아 놓은 열매통의 신기한 씨앗을 구경하고, 식물 그리기, 만들기를 한다. 그러다 문득 레드벨벳의 ‘빨간맛’을 신청해 듣고는 가져온 맥스봉 간식을 혜정씨에게 나눠주고 학원으로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래 해오던 방송작가 일을 멈추고 살던 동네에 꽃집을 겸한 동네책방을 열고 동네 뒷산에서 숲해설을 하는 김혜정씨를 만나 서울에서 자연과 가까이 사는 법을 택한 얘기를 들어봤다.

-책과 꽃, 차, 숲해설이 공존하는 이런 공간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꽃피는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 등산, 식물 3가지가 접목된 공간이다. 오래전부터 동네책방을 열고 싶어서 많이 구경 다녔고, 2년 전엔 책방을 준비하는 사람을 위한 워크숍에 참가했다. 불필요한 소비는 결국 다 쓰레기를 만드는 거란 생각에 소비를 잘 하지 않지만 책, 등산관련 물건, 화분식물은 아끼지 않고 산다. 수년에 걸쳐 식물을 잘 기르는 법을 공부했고 플로리스트(화훼장식 기능사) 교육과정도 이수했다. 이 세 가지가 다 개별적인 게 아니라, 모두 다 연결된 거다. 책은 숲과, 식물 자연에 관한 것들이며 물론 팔려고 갖다놨지만 실은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사오는 거다(웃음).”

▲ 지난 12일 오후 목2동 생태문학서점 & 식물가게 '꽃피는 책'에 놀러온 양화초등학교 아이들이 김혜정 씨(오른쪽)에게 직접 만든 '행복자판기'를 선물하고 있다. 컵 안에서 접힌 메모지를 꺼내 펴면 행복메시지가 들어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지난 12일 오후 목2동 생태문학서점 & 식물가게 '꽃피는 책'에 놀러온 양화초등학교 아이들이 김혜정 씨(오른쪽)에게 직접 만든 '행복자판기'를 선물하고 있다. 컵 안에서 접힌 메모지를 꺼내 펴면 행복메시지가 들어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거기다 숲해설까지 하는 이유는?

“숲해설가를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가게를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돈벌이는 해야 하는데 책, 식물 판매만으로는 힘들다는 걸 지난 2, 3년간 준비하면서 알았다. 많은 책방, 식물가게가 오래 못 간다. 책이 안 팔리는 날은 식물을 팔면 되고, 식물은 봄가을에 많이 나가며 책은 꾸준하다. 등산을 20년 간 즐기다보니 자연에서 만나는 작은 것에 살맛이 나고 감사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해서 이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너 이 매력적인 숲 좀 만나볼래?’ 하며 소개팅 주선자처럼 사람들에게 자연을 소개해주고 싶었고 그 방법이 하나는 책, 하나는 식물 기르기, 하나는 숲해설이었다. 주 2회 숲해설 나가고 그런 날은 오후 1시쯤 책방을 연다. 동네 어머님들은 오전에 와서 차 마시고 싶어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여기 자리 잡은 이유는?

“4년 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아온 여기 목2동은 ‘모기동’ 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성미산 공동체처럼 크진 않지만 마을공동체 활동이 10여 년 전부터 잘 된다. 매해 가을이면 젊은 예술가가 모여 꽁냥꽁냥 재밌는 마을축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셋째주 토요일에는 인근 공방 사람이 용왕산에 모여서 숲속마켓도 연다. 꽃책방에서 세밀화그리기 등 생태미술 할 때는 동네 미술 선생님 모시고, 나만의 화분 만들기 할 때는 동네 도자기공방 선생님 모셔서 화분을 만들어 거기에 식물도 심어보고, 목공방도 있으니까... 동네 분들하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책은 10% 할인하고 화분도 싸게 파는데 남는 게 있나?

“책은 하루 평균 두 권은 나간다. 동네책방 하는 분들이 하루에 한 권도 안 나가는 날이 많다고 한다. 책 소비자는 지인들이나 SNS 택배 주문이 많고 동네 사람은 아직 거의 없다. 오픈할 때 최소한의 이윤만 남기기로 했다. 가게 바로 앞에 학교가 있고 지척에 용왕산이 있다. 숲놀이와 숲해설을 주 수익원으로 삼기로 했다. 책을 10%씩 할인해주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꽃집에 올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인터넷 구매도 10% 할인되고, 여기와도 10% 할인 받는데, 이왕이면 책방에서 보면서 사지 뭐, 이런 맘이 들것 같다. 할인해서 사람들이 많이 오면 그게 더 좋다. 다른 유인책이 아직은 없다.”

▲ 7월 14일 인천대공원에서 열린 만수복지관 가족숲체험 행사에 김혜정 숲해설가가 아이들과 숲속 나뭇잎 미용실 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김혜정 숲해설가 제공
▲ 7월 14일 인천대공원에서 열린 만수복지관 가족숲체험 행사에 김혜정 숲해설가가 아이들과 숲속 나뭇잎 미용실 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김혜정 숲해설가 제공

-방송작가 일은 왜 쉬고 있는지?

“12년 동안 해왔던 작가 일을 지금 쉬고 있다. KBS 영상앨범 산, KBS 스페셜, 파노라마, 세계는 지금, 시사투나잇, MBC 뉴스후 등에서 작가로 일했다. 2년 전, 영상앨범 산 마무리하고 JTBC 시사프로그램으로 옮기자마자 최순실 사건이 터져서 엄청 바빴다.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고 거의 방송국에서 살았다. 숙직실에서 잠깐 자다 일어나 회사 안에서 밥 먹고 나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다가 아팠는데 병원 갈 시간도 없었다. 하혈을 했는데 심각한 줄 모르고 방송 끝나면 병원가야지 하며 버티다가 결국 방송 이틀 앞두고 응급실에 실려가 예상치 않았던 수술을 해야 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수술 후 열흘 입원하고 나와서 최순실이 뭐라고 이런 수술까지 하면서 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쉬면서 미뤄뒀던 숲해설가 전문가 과정 교육을 받았다. 올해 상반기에 SBS ‘물은 생명이다’ 제작진이 같이 일하자고 연락이 왔는데 책방 오픈 준비하느라 바빠서 못했다. 방송작가의 수명이 짧고, 연차 높은 작가는 돈을 많이 줘야하기 때문에 갈수록 일할 기회가 줄어든다. 돈 벌기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면서 즐거운 프로그램이면 다시 방송작가로 일하고 싶다.”

-방송작가 하다가 숲해설가에 관심 가진 계기는?

“20대 초반에 친구에게 이끌려 남도 도보여행을 갔을 때 시골길을 걷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 후로 등산에 재미를 붙였고 무릎수술을 해야 할 만큼 많이도 다녔다. 작가 일이 힘들었는데, 짬을 내 산에 갔다 오면 새 힘을 얻곤 했다.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으로 천천히 내가 바뀌더라. 처음엔 큰 풍경만 보였는데 어느 순간 나무가 보이고, 그 다음엔 꽃이, 더 작은 것들이 보였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보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예뻐서 사진 찍어오고, 사진 보니까 더 알고 싶어 공부하다보니 점점 많이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이름뿐만 아니라 그 식물에 얽힌 얘기 등을 설명해주게 되더라. 그러다가 숲해설가라는 직업을 알았다.”

-방송작가를 한 계기는?

“전공이 국문과(00학번)였고 원래 꿈은 기자나 PD였다. 대학생 때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학교 수업 듣고 신문모니터링 하다가 사무처 인턴까지 했다. 그 해 최우수 회원상도 받았다. 졸업 후 언론고시 준비하던 중 KTV 보도국 일자리를 소개 받았다. 주로 대담프로그램 전문가 섭외하고 질문 작성, 자료조사, 전화 인터뷰 등을 했다. 그 일이 작가인지도 모르고 가서 ‘김작가, 김작가’하고 불리다가 작가됐다. 2년 하고 그만뒀을 때 당시 인기 높고 영향력 있었던 KBS 시사투나잇에서 연락이 왔다. 시투 애청자였고 그 정도 프로그램이면 내가 함께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해 참여했다.”

-방송작가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비정규직 취재할 때 취재대상 비정규직보다 오히려 내가 더 힘든 상황도 많았다. 정의를 부르짖는 진보적 시사프로그램 제작진도 조직생활에서는 똑같이 권위적이고, 갑질하는 것을 보고는 방송 일에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한 대안언론에서 일할 때 공중파 출신 시니어가 촬영, 편집 일하는 계약직들에게 ‘우리들의 명성에 무임승차 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는 걸 들었을 때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엄청난 노동 강도다. 방송일이 며칠씩 밤새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스로를 죽이면서 일하는 느낌이랄까? 방송하는 사람들은 디스크 등 병을 많이 갖고 있다. 이제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내 삶을 누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런 일이 많진 않지만”

-방송사의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는 방법은?

“방송사 정규직 중에는 이런 생각 가진 사람이 많다. ‘나는 힘들게 공채로 들어왔고,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 이 프로그램은 내(정규직) 거고 저 사람(비정규직)은 그냥 도와주는 사람이야.’ 특히 기자들(피디들은 좀 덜하다). 이 기사는 내거야. 이런 태도가 일상 전반에 나타나는 게 문제다. 간혹 프로그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완성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당연히 그럴 때 훨씬 더 결과가 좋다. 똑같은 동료로만 대우해줘도 훨씬 열심히 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방송일이라서 프리랜서, 비정규직으로 적은 보수 받는 걸 감수하고 왔는데, 그 열의를 깎아먹는 사람이 많다.”

-기억에 남는 ‘꽃피는 책’ 손님은?

“2주에 한 번씩 오셔서 그림책을 너댓권 사가는 중년 여성 손님이다. 원래 20년 동안 문구점이었던 이 가게를 한 달 정도 천천히 리모델링 했는데 완공 전에 책방 간판을 먼저 달았다. 그분이 간판을 보고 책방 문 열기를 많이 기다렸다면서 오픈 첫날 그림책 다섯 권을 주문했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는데 동네에 서점이 생겨 너무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책 사러오는 분이 거의 없었는데 그 분 때문에 책방 할 의욕이 생겼다. 감사하다.”

-좋아하는 꽃은?

“2012년 무릎 수술 했을 때 절망적인 시기였다. 걷는 것이 인생의 큰 살맛이었는데 의사가 산에 가지 말라고 했다. 수술 후 3개월 집중재활치료를 받았다. 멀리 못가니까 집 앞 공원을 걷다가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예뻤다. 이 작은 꽃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제 멋과 향기를 뽐내면서 살아가는구나 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 큰 위안을 받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꽃마리였다. 숲해설가 교육 때 내 자연이름을 ‘꽃마리’로 지었다.”

▲ 김혜정 씨가 아이와 함께 방문한 손님에게 미모사(신경초)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김혜정 씨가 아이와 함께 방문한 손님에게 미모사(신경초)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한 여름에 추천하는 식물은?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모기를 쫓아주는 효과가 있다는 구문초를 권한다. 화려한 꽃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대표적인 여름꽃 중 하나인 수국을 추천한다. 수국은 여름에는 꽃이 풍성하게 피어 아름답지만 가을이 되면 잎이 다 떨어진다. 모르는 사람들은 죽은 줄 알고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봄이 되면 새싹이 다시 올라온다. 생명력이 강하다.

- 동네책방, 꽃집, 숲해설가로서 워라밸은 어떻게?

“꽃책방을 열면서 ‘품이 큰 나무, 그 품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나무, 그 그늘에 앉아 쉬면 더없이 평화로워지는 나무 같은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내 마음속에 그 나무는 은행나무다. 공룡시대부터 살아왔었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도 살아남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졌고, 활엽수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침염수인 독특한 나무. 알고 보면 매력적인 나무라는 반전을 가진 큰 은행나무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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