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 기고를 두고 송사를 벌인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과 여성신문이 모두 1심 판결에 항소했다. 탁 행정관이 여성신문 기고 글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자 여성신문은 “부당한 판결”이라며 지난 11일 항소했다. 탁 행정관 측도 18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6단독 김상근 판사는 지난 10일 탁 행정관이 여성신문을 상대로 제기한 3000만 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여성신문은 탁 행정관에게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를 둘러싼 양측의 다툼은 어떻게 진행될까. 이 사건 판결문을 통해 지난 1심을 다시 살펴봤다.

문제 발단은 탁 행정관이 지난 2007년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린 책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다. 탁 행정관은 이 책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학생 3학년 여자애랑 자봤다고 자랑하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 여학생에게 요구해 성관계를 했는데 나는 첫 경험이었으나 상대 여학생은 친구들이 섹스 대상으로 공유했던 쿨한 여자였고 나는 그 여학생과 성관계를 맺은 친구들 중 4번째였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 대목을 포함한 그의 저서들로 탁 행정관은 왜곡된 성인식 및 여성관, 여성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사회적 파문이 일자 탁 행정관은 지난해 7월14일자 경향신문 인터뷰를 통해 해명 및 사과를 하며 책에서 언급한 고교 시절 여중생과의 성경험 이야기는 전부 꾸며낸 내용(픽션)이라고 밝혔다. 

탁 행정관은 책 말미 에필로그에 “대부분의 수다가 그러하듯 실컷 쏟아낸 말들 중에는 때로는 새빨간 거짓말도 있고 다소 과장하거나 아예 숨김 것들도 있고, 차마 못할 말도 있고 꼭 했어야 하는데 빠진 말들도 있다”고도 직접 쓴 바 있다.

여성신문은 탁 행정관의 경향신문 인터뷰 이후 시점인 7월25일 “[기고]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호주 시드니에 거주 중인 ‘제제밍’(Zeze Ming)이라는 필명의 기고자 글을 게재했다. 같은 날 트위터에도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너무나 아픈 상처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제 스스로도 애써 잊고 살려 했지만… 이렇게 털어놓아봅니다’”라는 인용구를 적고 기사를 공유했다.

여성신문 기고는 기고자가 실제 탁 행정관과 성관계를 맺은 인물로 비쳐져 논란이 컸다. 그러나 이 글은 탁 행정관이 책에서 묘사한 내용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한 성폭력 피해 여성의 고백을 담은 것이었다.

같은 날 오후 여성신문은 기고 글 제목과 본문 내용에서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제목을 “[기고] 그 ‘여중생’은 잘못이 없다 - ‘탁현민 논란’에 부쳐”로 바꿨다. 여성신문은 “기고자가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제목으로 인해 잘못 읽힐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제목과 내용 일부를 수정했다”는 안내 문구를 추가했다.

▲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 사진=민중의소리
▲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 사진=민중의소리
주장과 입장은 엇갈린다. 탁 행정관 측은 “독자 대부분이 언론기사를 접할 때 기사 제목만 보고 구체적 내용을 잘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기사 제목으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단순한 비유적이고 압축적 표현의 한계를 벗어난 악의적 보도”라고 주장했다. 이 자체로 심각한 명예훼손이고 인격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라는 것이다.

반면 여성신문 측은 “탁현민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구체적 사실 적시가 없고 탁현민이 주장하는 인격권 침해 손해는 자신이 발간한 여러 저술 내용으로 인한 것일 뿐 이 사건 기사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사와 손해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고 게재 행위는 공공 이익에 관한 것이라서 위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했을까. 김상근 판사는 △기사(기고) 제목 △기사 본문 △트위터 게시물(기사) 등으로 나눠 판단했다. 김 판사는 “기고자는 원고(탁현민)가 책을 통해 첫 성경험 대상자로 지목했던 여중생과는 동일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피고(여성신문)는 이 점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충분히 알 수 있었다”며 “그런데도 여성신문은 기고문을 인터넷 홈페이지 및 트위터 계정에 기사로 게재하면서 제목을 ‘[기고]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라고 붙였다. 이와 같은 기사 제목은 기고자가 바로 책에서 언급된 탁현민과 첫 경험을 가진 여학생인 것처럼 사실을 적시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고 제목은 본문 내용으로부터 현저히 일탈하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허위사실을 기재한 별도의 독립된 기사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 판사는 본문과 관련해서도 당초 첫 문장이었던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 등을 언급하며 “일반 독자들로서는 주의를 가지고 끝까지 전체적 내용을 보지 않는다면 기사 제목과 본문 초반부 내용을 통해 기고자가 바로 책에서 언급된 여중생이라는 인상을 받을 여지도 있다. 이 점에서 기사 제목과 본문은 허위사실을 적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트위터 기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판단이었다. 김 판사는 “트위터 기사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별개의 독립된 기사로서 의미와 기능을 하고 있다”며 “트위터 기사를 본 일반 독자로 하여금 기고자가 책에서 언급된 여중생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할 우려가 홈페이지 기사의 경우보다 훨씬 더 높다. 트위터 기사 역시 허위사실 적시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김 판사는 ‘허위 사실 적시’ 등의 이유로 위법성 조각 사유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탁현민이 책에서 언급한 여중생과의 성경험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점을 이미 수차례 밝혔는데도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해명이 사실과 다른 거짓 해명인양 인상을 받도록 허위사실을 적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허위사실 적시는 특히 공직에 취임하게 된 탁현민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기에 충분한 구체적 사실 적시에 해당한다.”

다만 김 판사는 탁 행정관이 청구한 손해배상액 3000만 원 가운데 1000만 원만 인정했다. 김 판사는 “탁현민이 양성평등 측면에서 적절하지 못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을 뿐 아니라 꾸며낸 허위 내용을 소재로 해 상업적인 목적으로 마치 사실인양 포장해 책자 형태로 발간함으로써 여성관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자초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며 탁 행정관 책임도 있다고 봤다.

여성계는 판결에 즉각 반발했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은 지난 10일 “재판부의 이런 판결은 고위 공직자가 강간을 판타지로, 여성에 대한 명백한 성폭력을 성문화로 낭만화한 내용을 출판해도 문제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적 업무 수행에 지장이 안 된다는 메시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이번 판결은 공직자의 성평등 인식과 젠더 감수성 변화가 더욱 요구되는 현 시대 흐름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성신문도 “이번 판결은 사실상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침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미투 운동과 같은 최근의 사회 변화에 역행하는 판단이라는 점,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부당한 판결이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반면 탁 행정관 측 변호인은 “명예훼손으로 인한 위자료에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더 있다”며 “또 실질적으로 1심 판결 이후 나오는 왜곡된 반응과 잘못된 보도로 탁현민씨는 고통을 겪고 있다. 추가적 손해가 판결 이후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인은 “이번 항소심에서 여성신문 보도 이후 빚어진 사회적 파장, 판결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왜곡된 보도와 단체들의 행동, 그로 인한 추가 손해와 정신적 피해 등을 제대로 따져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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