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노동사건을 선고할 때 판사의 첫 말이 ‘원’이면 노동자가 이기고, ‘상’이면 진다. ‘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00고등법원에 환송한다”는 말의 시작이다. ‘상’은 “상고를 기각한다”의 시작이다. 고개 숙인 채 숨 죽여 판사에게 귀 기울였던 김선수 변호사는 노동자와 함께 대법원 법정에 앉아 30년째 ‘원’과 ‘상’의 전투를 이어왔다.

김선수 변호사(이하 김변)는 1988년 고 조영래 변호사 밑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해 30년째 노동자와 함께 살았다. 김변이 진단한 오늘의 노동권은 27년째 나아지지 않았다. 공무원과 교사 노조가 인정됐지만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부정하는 반쪽짜리고, 평화적 단순파업에도 업무방해죄를 적용하고, 한국 대표기업은 여전히 무노조주의를 천명하고, 노동유연화로 비정규직이 대거 양산돼 참으로 답답하다.

김변은 1983년 23살에 사법시험 준비를 죄의식과 자책감으로 시작했다. 당시 친구들은 변혁을 찾아 노동현장으로 향했지만 그는 노동변호사를 목표로 고시 공부에 들어갔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끼니 때 2번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계속 앉아서 책과 씨름했다. 2년 만에 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거쳐 1988년 2월 조영래 변호사가 일하는 시민공익법률상담소로 첫 출근했다.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시작했다.

김변은 전북 진안의 전기도 안 들어오는 깡촌에서 농사짓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강했던 아버지는 김변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을 정리하고 도시로 나왔다. 장학금을 따라 고교를 정했고, 서울대 법대 3학년 때 강제징집 당할 때도 장학금이 끊길까봐 걱정했다. 군대 다녀온 사이 장학금 이름이 ‘5.16 장학금’에서 ‘정수장학금’으로 바뀌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졸업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스승이 주신 호 ‘여민’은 ‘검게 그을린 서민’

10대 때 고교 은사 김창규 선생이 ‘여민동락’을 말하며 그에게 여민(與民)이란 호를 지어 주셨다. 왕과 백성이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상 정치를 일컫는 말이다. 여민(與民)은 노동으로 살갗이 검게 그을린 서민을 뜻한다. 실제 김변은 여민처럼 얼굴이 검다.

김변은 불과 3년 남짓이지만 조영래 변호사를 모신 걸 큰 행운으로 여긴다. 전태일 평전을 썼던 조영래 변호사는 사건을 접했을 때 그 사건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해결책을 찾는데 귀신이었다. 이런 정신으로 조영래 변호사는 민주화와 인권, 변혁이란 핵심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치고 들어갔다. 조변의 문장력은 치밀한 논리뿐만 아니라 가슴을 깊이 파고드는 감성이 깔려 있다. 그래서 김변은 늘 조변의 문장력에 감탄했다. 쓴 글을 고치고 쓰고 또 고치는 피눈물의 시간이 조변을 우리 곁에서 일찍 데려갔다. 조변에게 칼럼 하나는 곧 담배 3갑이었다.

김변은 1989년 12월 28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발표한 ‘민생 치안에 관한 특별지시’ 이후 밀려드는 노동사건을 맡았다. 특별지시는 겉으론 법질서 확립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조합 탄압이었다. 그 때부터 노사갈등 현장에 대규모 전경을 마구 투입했다. 1989년 1월 1일 서울 성동구 모토로라코리아에, 다음달 새벽엔 방위산업체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전경이 들어가 노조원을 진압했다. 모토로라와 풍산금속 해고가 김변이 맡은 첫 사건이었다. 그 때 김변이 변호한 해고자 권영국은 세월이 지나 변호사가 됐다.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때 서울 계동 본사 농성장에서 구속된 노조간부 6명도 김변이 맡았다. 1989년 4월 금성전선 노조 김상호 위원장 구속사건도 맡았다. 김변은 “위원장을 가족처럼 믿고 걱정하던 조합원에게 큰 감동을 받았고, 김 위원장 부인이 보여준 의연하고 기품 있는 태도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 위에서부터 중앙일보 6면, 한국일보 3면, 한국일보 사설. 사진은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당시 피청구인인 통진당 측 변호를 맡은 김선수 변호사가 청구인 자격으로 나선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함께 서 있다.
▲ 위에서부터 중앙일보 6면, 한국일보 3면, 한국일보 사설. 사진은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당시 피청구인인 통진당 측 변호를 맡은 김선수 변호사가 청구인 자격으로 나선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함께 서 있다.

1989년부터 빗발치는 시국사건을 맡으며 김변은 폭력의 시대가 낳은 역사의 현장과 30년 동안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런 김선수 변호사가 대법관에 임명 제청됐다. 그의 제청을 놓고 한국일보는 3일자 ‘다양성 중시한 신임 대법관 3명 제청, 이념 공방 자제해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야권은 이념이 아닌 다양성 차원에서 자질과 가치관 검증에 주력하기 바란다”고 썼다.

그러나 한국일보 사설이 무색하게도 자유한국당은 벌써부터 그가 통진당 해산 때 변호인 단장을 역임했다며 “대법관 자격 논란이 있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한국당 발언을 3일자 6면에 그대로 제목에 달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아예 ‘코드 냄새 물씬 나는 대법관 3명 제청’이란 제목으로 사설도 썼다.

여성고용률 보여주는 M곡선 오른쪽 이동 둘러싼 해석

동아일보(16면)와 경향신문(18면)이 2일 통계청이 발간한 ‘통계로 본 여성의 삶’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여성 노동자의 41%가 비정규직이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시간제 노동라서 여전히 성별격차가 심하다고 소개했다. 경향신문도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보다 1.5배 이상 많아 여성의 고용조건이 불리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경력단절로 30~40대에 고용률이 떨어지는 M자 곡선을 보이는 여성 고용률이 깊이도 얕아지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경력단절 완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는 통계청 사무관의 해석을 인용했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여학생 대학진학률이 72.7%로 남학생(65.3%)보다 높아 역대 최대 격차를 기록하며 교육에서 여성의 성취도가 남성을 앞질렀다고도 했다.

그러나 M자 곡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한 건 경력단절 완화 정책 때문이라기보다 아이 낳고 기를 형편이 안 되는 여성들이 결혼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한 채 저임금 고용시장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깊이 파인 M자 곡선이 얕아진 것도 저임금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에도 고용시장에 힘겹게 매달려 있을 때가 같은 현상을 보인다. 단순히 고용률 숫자가 아니라 고용의 질을 살펴보는 통계와 분석이 아쉽다.

▲ 경향신문 18면
▲ 경향신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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