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의 한 방송사에서 6년째 일하는 A씨. A씨는 자신의 노동이 불법파견이란 사실을 올해 처음 알았다.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하 파견법)에 따르면 A씨는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2014년부터 정규직이 돼야 했다.

파견노동이란 ㄱ회사(파견업체)에 고용되고 임금도 ㄱ회사에서 받지만, 일은 ㄴ회사(사용 사업주, 원청)에서 하는 간접고용을 말한다. 1998년에 제정된 파견법에 따르면 파견기간 2년이 되면 ㄴ회사(사용 사업주)는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하며, 이런 고용형태는 32개 업종으로 제한돼있다.

A씨는 계약을 갱신할 때가 다가오자 원청 선배에게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다. ‘파견업체를 여러 번 바꿨으니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A씨가 ‘파견법 위반’이라고 반박하자, 회사는 이렇게 답했다. “파견이 아닌 도급계약으로 일하는 것이고, 이의제기를 했으니 이다음 계약은 성사되지 않을 수 있다.” 현대기아차 등 대부분 원청회사는 간접고용 노동자가 파견법 위반이라고 문제제기하면 일단 도급이었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법원은 대부분 불법파견이라며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 8개월 동안 접수한 갑질사례 가운데 방송계 불법파견 실태도 심각했다. 그러나 정부는 파견노동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아 개선이 요원하다.

직장갑질119는 1일 파견법 시행 20주년을 맞아 불법·편법 파견노동 사례 통계를 발표했다. 방송계 안팎에서 가장 흔한 갑질 유형은 이른바 ‘임금 꼼수(45건, 25.1%)’다. 불안정한 파견노동자의 동의 없이 상여금을 줄이거나 ‘무늬만 휴식시간’을 늘리는 방식이다.

방송사 보도국 FD 소속으로 일하는 B씨의 경우가 그렇다. 올해 최저시급이 대폭 오르자, 회사는 연장수당 30만 원을 없애고 휴식시간을 새로 만들었다. 형식상 휴식시간을 늘리면서 노동시간이 짧아져 받는 돈은 그대로다. 회사는 휴식시간이 언제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현재 B씨는 휴식시간에도 일한다.

파견법 위반 소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노동자를 일방해고하는 경우도 40건(22.3%)에 달했다. C씨는 방송사에서 도급직원으로 수년째 일해 왔다. 도급이란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체결한 계약을 말한다. 원청 사업장에서 일하면서 하청(도급업체)에 고용돼 급여를 받는다는 점은 파견노동과 같다. 차이는 업무지시도 도급업체가 한다는 데 있다. 현행법은 파견 허용직종과 기간 등은 규제하지만, 도급노동은 제재하지 않는다.

C씨는 같은 부서 소속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한꺼번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회사는 ‘잘못된 고용 체계를 바꾸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C씨는 업무량이 해직 통보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고 토로한다. 일방으로 해고 당했는데 업무 요구도 일방으로 들어줘야 했다.

직장 내 괴롭힘도 만연하다. 파견·도급 노동자는 고용이 불안정해 갑질을 겪어도 문제제기하기 힘들다. 한 지상파 방송사 자회사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는 D씨의 경우다.

원청 상사인 팀장은 D씨에게 “여기는 선배들이 남자고 나이도 많으니 애교를 부리며 일하라”고 요구했다. 팀장은 이유를 말하지 않고 거리가 먼 곳으로 출근지를 바꾸라고도 했다. D씨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거리가 멀어 어렵다”고 하자 ‘내일 자르겠다’는 협박을 들었다. 다음 날 다른 선배는 ‘넌 파견직이니 선배가 하라면 하는 거다’라며 ‘조언’해왔다. 다시 찾아가 출근지를 바꾸겠다고 얘기했지만, 팀장은 싫다며 버티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갑질에 취약한 파견노동 실태 파악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대 정부는 국내 공공·민간 영역을 통틀어 한 번도 파견노동 실태를 조사한 적이 없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다른 걸 다 떠나, 정부가 실태조사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운영위원은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방송사부터 불법·편법 노동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박 운영위원은 “공공기관부터 시작해야 한다. KBS든 국회방송이든 정부가 소유한 방송부터 조사하면 파견노동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드러난다”고 했다.

직장갑질119는 1일 보도자료에서 “정부가 파견, 용역, 하청, 도급직원을 사용하는 모든 회사를 대상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파견법 위반 여부를 가려 직접고용을 명령하고, 상습 위반한 회사를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직장갑질119는 “국회는 중간착취를 허용하는 파견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와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 5개 노동단체는 2일 낮 12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파견법 시행 20년을 맞아 자동차, 방송사, 전자, 철강 등 여러 업종에서 일하는 파견노동자 20명이 직접 나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본 파견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이날 회견에는 한국GM 부평공장에서 불법파견 하청노동자를 지낸 민변 노동위원회 이용우 변호사가 파견법의 문제점을 설명한다. 파견법은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7월1일부터 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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