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정하지 않은 현 병역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지난 70여 년 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주장해 온 요구에 손을 들어줬다. 국회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대체복무제 마련’이란 과제가 주어졌다.

헌법재판소는 28일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5조에 재판관 6명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단 병역거부자 처벌근거인 병역법 88조엔 합헌 결정이 나왔다.

▲ 헌법재판소.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헌법재판소.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병역법 5조는 △현역 △예비역 △보충역 △병역준비역 △전시근로역 등만을 병역종류조항으로 정하고 있다. 88조는 입영·소집통지서를 받은 자 중 정당한 사유없이 입영·소집하지 않을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정한다.

헌재는 “5조의 병역들은 모두 군사훈련을 받는 것을 전제하므로, 양심적 병역의무자에게 병역을 부과할 경우 그들의 양심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며 “전체 국방력에서 병역자원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낮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방력에 의미 있는 수준의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대체복무제 도입이 우리나라 국방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거나 병역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린다고 보기 어려운 이상, 특수한 안보상황을 이유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거나 그 도입을 미루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할 수 없다”며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만을 규정한 병역종류조항은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시했다.

헌재는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최소 1년 6월 이상의 징역형과 그에 따른 공무원 임용 제한 및 해직, 각종 관허업의 특허·허가·인가·면허 등 상실, 인적사항 공개, 전과자에 대한 유·무형의 냉대와 취업곤란 등 막대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며 “법익의 균형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처벌조항을 두고 재판관 의견은 엇갈렸다. 재판관 9명 중 4명은 일부 위헌, 4명은 합헌 결정을 내렸고 재판관 1명이 각하 결정을 내면서 이 조항은 합헌 결정이 났다.

일부 위헌을 주장한 재판관은 “처벌조항의 위헌 여부는 병역종류조항의 위헌 여부와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며 “병역종류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위헌 결정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봤다.

합헌 결정을 내린 재판관은 병역거부자 처벌이 “입법 미비와 법원의 해석이 결합돼 발생한 문제일 뿐 처벌조항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일부 재판관은 “(대체복무제는) 안보관에 부정적 영향을 줘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자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할 수 있고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군인 등의 사기를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의견을 냈다.

▲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헌재의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결정과 대체 복무제 마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헌재의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결정과 대체 복무제 마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 보장을 둘러싼 과제는 국회로 넘어갔다. 헌재는 “헌법재판소는 2004년 입법자에 대해 국가안보 공익을 실현하면서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지 검토할 것을 권고했는데 14년이 지나도록 입법적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며 “최근 하급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판결을 선고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국가는 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병역종류조항으로 인한 기본권 침해 상황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앰네스티가 지난 5월 ‘여호와의 증인’, ‘전쟁없는 세상’ 등의 자료를 취합해본 결과 지난 60년 간 양심적 병역거부로 감옥에 수감된 거부자는 2만 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여호와의 증인이 자체 집계한 수감자만 1만9300명이다.

여호와의 증인 관계자는 “이들의 누적된 수감 형기를 다 합치면 3만6700년이고 연 평균 500~600명 정도의 수감자가 발생했다. 현 수감자 인원은 200여 명 정도”라고 밝혔다.

앰네스티도 지난 5월 기준 교도소에 수감된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238명 이상이며 약 900건에 이르는 양심적 병역 거부 관련 재판이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며 판결이 보류된 상태라고 밝혔다.

법원 하급심에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 따르면 2004년 한 신자가 최초로 형사소송을 제기한 이래 89건의 무죄판결이 나왔고 그 중 28건이 2018년 판결이다.

이번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박정훈씨(34)는 “이번 결정은 헌재가 국회에 ‘너희가 일을 하지 않아서 국민들이 처벌을 받고 있다’고 확인한 것인 동시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감옥에 갈 사람이 아니란 점도 확인해 준 것”이라며 “진일보한 결정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박씨는 지난 2014년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군사훈련을 거부해 교도소에서 1년6월 복역했다.

박씨는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정할것인지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의 2라운드가 될 것이다. 복무기간을 과도히 늘리거나 위험한 노동으로 내모는 징벌적 대체복무제 방향으로 가선 안될 것”이라며 “독일처럼 해외자원활동을 대체복무로 받아들인 사례가 있다. 국가가 청년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이 아닌 시민으로서의 의무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 다수가 군사훈련 복무 자체를 신념에 따라 거부하므로 4주 간의 군사훈련을 배제하는 대체복무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호와의 증인 관계자 또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법정에서 군대, 병무청, 국방부의 관할이 아닌, 순수 민간 부문의 대체복무가 도입된다면 개인 양심에 따라 대체복무 소집에 응할 수 있다고 밝혀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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