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으려는 4차 희망버스에 5천여 시민이 모였다. 무대 위 화려한 공연과 달리 무대 뒤는 초초했다. 어떻게 경찰 저지선을 뚫고 2차 집결지까지 갈지. 당시 사회당 대외협력실장 권문석씨도 한진 희망버스 살림꾼이었다.

권씨는 5번의 희망버스 내내 그림자 노동자였다. 권씨는 주로 상황실 식구들 저녁 김밥이나 종량제 봉투 구입, 폭죽 나르기, 행진용 피켓 챙기기, 이튿날 아침 식사 같은 궂은일을 맡았다. 한여름 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2리터짜리 생수를 옮기던 그는 결코 빛나지 않았지만 묵묵히 맡은 일을 했다. 소리 없는 노동 뒤에서 그는 끊임없이 고민을 쏟아냈다. 4차까지 온 희망버스가 어떤 성과를 내고 마무리해야 하는지.

2년 뒤 권씨는 알바연대를 만들었다. 막 주목 받기 시작했는데 그가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맨 처음 ‘최저임금 1만원’을 외친 사회운동가 권문석을 기리는 책이 나왔다. 알바연대 대변인 권문석씨(35)가 숨진 지 5년 만에 추모사업회가 책 ‘알바생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오준호, 박종철출판사)를 내고 6월2일 기일에 맞춰 출판기념회를 연다. 추모사업회는 이 책으로 권씨와 헤어지는 동시에 그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보존하겠다고 했다.

신문사 문선공이었던 아버지는 전자조판이 도입되자 일자리를 잃었다. 어머니는 건국대 근처에서 하숙을 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두 누나 아래 막내 권씨는 어려서부터 대학생 형들 틈에 자랐다. 96년 성균관대에 입학해 시작한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으로 이어져 16년이 흘렀다.

10년을 알고 지낸 아내와 결혼하고 2012년 8월 딸을 얻었다. 2012년 겨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알바연대는 그 겨울 추위에 태어났다. 2013년 1월 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기자가 아무도 오지 않는 출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알바연대를 만들었으니 알바노동자를 만나러 가야 했다. 홍대, 신촌, 강남, 대학로 등 청년이 많이 오가는 곳에서 ‘최저임금 1만원’ 캠페인을 벌였다.

알바연대는 2013년 2월 28일 노동부와 카페베네, 파리바게뜨, 롯데리아, GS25 다섯 곳을 ‘알바 5적’으로 지목했다. 당시 최저임금의 2배가 넘는 1만원을 구호로 내걸었으니 황당하다는 얘기가 뒤따랐다. 알바연대는 카페베네를 ‘등골빼네’로, 롯데리아를 ‘농노리아’로 청년들의 통통 튀는 순발력을 먹고 자랐다. 알바연대는 4월 25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경총 조찬포럼장에 뛰어들어 기습시위를 했다.

권씨는 알바생이란 모호한 이름 대신 ‘알바노동자’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바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노동3권을 뺏긴 채 살아가는 노동자가 무려 200만 명이었다.

권씨는 최저임금위원회가 본격으로 열리는 6월 한 달을 빡세게 준비했다. 우선 청년들에게 최저임금을 설명하고 ‘왜 1만원’인지 설득해야 했다. 권씨와 알바연대는 6월 1일 홍대 근처에서 ‘최저임금 1만원 아카데미 종일 특강’을 열었다. 최저임금 관련 150쪽짜리 문서를 만들어 3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다. 권씨는 ‘최저임금 1만원의 매우 구체적 근거와 경총 등 사용자 논리 비판’이란 긴 이름의 강의를 맡았다. 피곤에 지친 권씨는 집으로 돌아와 10개월 된 아기를 먼저 재우고 소파에 누웠다. 다음날 깨어나지 못했다. 30대 중반에 찾아온 급성 심장마비.

세련된 이론보다는 한국은행과 통계청 자료를 뒤져 찾아낸 구체적 수치로 세상을 풀어갔던 권씨는 우공 같은 사람이었다.

사회운동가 고 권문석 추모사업회(금민 회장)는 6월2일 오후 2시 지하철 신촌역 앞 신촌르호봇G캠퍼스(마포구 백범로 10)에서 5주기 추모식과 함께 북토크 행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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