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지난달 27일 열린 제3차 남북 정상회담 평가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는 정치학자인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와 독일통일을 연구한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지난 4일 미디어오늘 회의실에서 열렸다. - 편집자주

- 4·27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총평해 달라.

이동기 교수 : 판문점의 상징적인 의미가 잘 부각됐다. 판문점이 폭력의 공간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전환됐다.’남북이 만나니 상쾌하네’라는 새로운 정치 감성을 일깨운 일이었다. 심지어 도보다리 대화 시 새들의 울음소리조차 평화의 화음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공간이 바뀌면 새로운 말과 행동, 태도, 아비투스 등이 폭발적으로 등장한다.

김세균 교수 : 판문점은 최적의 장소였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그동안 천둥벌거숭이 이미지를 벗고 정상적 지도자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냉전체제 붕괴 이후 다극화된 국지적 갈등 속에 남북이 힘 합쳐서 대결구도를 극복할 자신감을 보여줬다.

이동기 교수 : 이명박, 박근혜 시기에 제주 강정, 경북 성주 등 새로운 비평화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반대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평창, 강릉, 판문점까지 새로운 평화의 장소가 생겼다. 평화의 공간이 많이 생겨나 흥미로운 퍼포먼스들이 진행됐다. 아울러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이 그것을 함께 지켜보며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집단적 평화 학습의 경험과 기억의 장이 새로 만들어진 것은 의미가 크다.

▲ 지난 5월4일 미디어오늘이 4월27일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 평가 좌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왼쪽)와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정착에 필요한 과제들을 제안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5월4일 미디어오늘이 4월27일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 평가 좌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왼쪽)와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정착에 필요한 과제들을 제안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 남북, 북미관계의 급작스런 전환의 배경은?

김 : 촛불혁명으로 평화체계를 원하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미국은 북핵 개발이 일정한 수준에 이른 만큼 오바마 시절처럼 ‘전략적 인내’를 넘어 전쟁이냐 협상이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북한도 핵 개발 과정에서 경제가 더 어려워졌다. 대안은 과감한 시장경제 수용밖에 없다. 북한은 중국과 베트남 모델을 보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돼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었다. 천우신조의 기회다.

이 : ‘우발성과 타이밍’을 강조하고 싶다. 냉전사 연구에서 냉전의 원인을 의사소통 문제에서 찾는 연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관점은 냉전시기 미.소와 동.서독이 상대에게 평화의지를 명확히 전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서로가 늘 최악을 설정하고 전략을 짜다보니, 오해와 불신이 공포를 낳고, 공포가 오해를 심화시켜, 냉전과 분단이 오래 지속됐다. 오해와 불신의 악순환을 제거하려면 타이밍과 행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현재 남북한 지도자가 이전시기 대화가 지속되지 못한 것에 대한 학습효과도 컸다. 그 결과 선린관계와 평화정착에 명확한 의지 전달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미국과 중국 눈치 보는 것을 뛰어넘어, 남북한 지도자를 능동적 행위자로 만들었다.

▲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나 군사분계선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나 군사분계선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 앞으로 우리는 이 대화국면을 어떻게 끌어나가야 할지?

이 : 냉전사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헤게모니 열강들의 입장이나 전략이 생각보다는 명확하지 않았고 혼재 상황인 경우도 많았다. 오히려 중소 국가들의 능동적 역할과 독자적 행위 여지가 많았다는 연구 결과도 줄을 잇는다. 한반도와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반도 자체가 변하면 주변 강대국들도 따라 변한다. 동서독 통일 과정에도 서독이 평화정치에 적극 나서자 미국은 독일 민족주의가 다시 발호하지 않을까 상당히 우려했다. 미국은 서독 지도부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지 않은 걸 알고도 계속 견제했다. 당시 주변국들도 서독이란 새로운 국제 정치무대 주인공의 등장을 불편해했다.남북한 대화가 계속되면 한반도 주변국들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까지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한다.

김 : 한반도 대화국면이 계속되면 미국과 중국이 서로 한반도를 자신들 영향력 하에 두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이 내놓는 카드를 모두 흡수해 가는 전략적 균형정책을 취해 나가야 한다.

▲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이치열 기자
▲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이치열 기자
이 : 전통적 사고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정치적 상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꼭 중립국이라고 확정하진 않더라도 아시아의 스위스,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될 수 있다는 정치외교적 사유가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고 거기에만 조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인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도 고민하는 과감한 상상과 논의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민족자주’를 넘어서 실제 의미 있는 평화의 교두보가 돼야 한다.

- ‘판문점 선언’ 특성과 의의, 과제는 무엇인지?

이 : 판문점 선언은 법적 정치적 안정성을 얻어야 한다. 1972년 12월에 동서독이 맺은 ‘기본조약’(발효는 1973년 6월부터)은 국제법상 지위를 얻었다. 동서독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았다. 서독 의회는 268:217로 아슬아슬하게 가결했다. 바이에른 주정부는 연방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걸었다. 독일 헌재는 헌법 소원을 기각했고 여기서 통일로 가는 불가역성이 형성됐다. 이후 1974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해 정치적 안정성까지 확보했다. 그런데 우리의 2000년, 2007년 남북 합의는 이런 절차를 밟지 못해 유야무야 됐다. 이번 판문점 선언은 꼭 국회 비준이 아니더라도 어떤 종류든 정치적 승인 과정이 필요하다.

김 : 가능하다면 국회 동의를 받으면 한다. 시기는 북미 정상회담 뒤에 하는 게 맞다. 독일 기본조약과 우리 3번(2000년, 2007년, 판문점)의 선언은 차이가 있다. 독일 기본조약엔 “민족문제 등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라고 표현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양쪽 국가관계 정상화 의지만 표명했다. 반면 우리는 ‘통일’이 늘 따라다닌다. 통일의 방법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이번 판문점 선언은 앞의 2번과 달리 ‘완전한 비핵화’ 명시한 게 큰 의미다. 그동안 북한은 ‘비핵화’는 미국과 협상할 내용이라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큰 변화다.

- 이후 평화와 통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지?

이 :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 대화에서 ‘베트남 모델을 언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베트남 모델은 독자적인 국가모델이다. 이건 이후 통일 논의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독일도 1972년 기본조약에 ‘통일’ 논의를 유보했다. 평화정착과 통일 논의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우리 통일논의 중에 ‘남북 국가연합’은 단일한 통일국가의 전단계로 간주해 왔는데 단일한 국가를 전제하지 않고 국가연합을 평화모델로 좀 더 오래 활용하면 어떨까 한다.

김 : 독일이 기본조약에 ‘통일’을 빼 통일논의를 유보시켰다. 그 결과 흡수통일이 돼 버렸다. 통일한 건 좋지만 흡수통일은 동독체제가 가진 모든 걸 무로 돌려 버려서 통일 이후 독일이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우리 사회 젊은이들은 “왜 굳이 통일을 하려는가, 남북 간에 잘 지내면 되지”라고 말한다. 띠라서 평화체제가 상당한 기간 필요하다. 그 속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국가연합’(2국가 2체제)도 생각할 수 있다.

▲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사진=이치열 기자
▲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사진=이치열 기자
이 : 국가연합으로 장기간 가는 게 좋겠다. 국가연합을 그 자체로 하나의 평화체제의 모델이자 분단극복의 한 양식으로 봤으면 한다. 성급한 통일논의는 위험하다. 잘못하면 북한에 엄청난 위협과 압박이 된다. 먼저 북한은 베트남 모델로 가고, 우리는 핀란드나 스위스, 오스트리아로 가보면 어떨까. 두 개의 중립국 모델도 가능하다. 독일에서도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직후부터 1967년까지 국가연합 논의가 활발했다. 그 영향에서 나온 게 빌리 브란트의 “접근을 통한 변화”(신동방정책)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에도 논의가 활발했다. 국가연합론의 백가쟁명 시기였다. 우리도 평화체제와 분단극복의 다양한 방식에 대한 사유 실험에 진입해야 한다.

- 남남갈등 등 한국 사회 내부의 과제는?

김 :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수구세력은 역사도 오래되고 무시할 수도 없다. 이들은 남북, 미북의 대결을 원한다.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많이 받아들여 양극화가 심화돼 거시지표는 좋은데 민생경제가 어려워졌다. 이때 우리나라 극우세력이 급성장했다. 이들은 민생경제 파탄의 원인을 북한 퍼주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며 득세했다.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지가 관건이다. 현 정부가 실패하면 다시 극우세력이 발호할 수 있다.

이 : 빌리 브란트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 없이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 말은 출발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간혹 이걸 뒤집어도 봐야 한다. 즉“평화 없이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평화만 얘기하다가 더 많은 평등과 민주주의를 간과해선 안 된다. 독일 통일은 서독 사회의 민주화와 개방성, 복지국가를 통한 사회적 안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열쇠는 평양이나 판문점, 워싱턴, 베이징에 있는 게 아니라 ‘광화문에 있다’. 우리 사회가 아래로부터 민주화의 역동성을 유지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현할 때 비로소 한반도 평화가 가능하다. 한편 판문점 선언에 개성 연락사무소 설치가 포함됐다. 독일도 기본조약에 따라 동서독간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당시 서독 사민당 정권은 기민련의 보수 정치가를 자주 상주대표부에 초대해 동독 정치가들과 대화토록 주선했다. 사민당은 기민당 안에 자유주의 진보 블록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보수주의자들도 동방정책을 계승하고 수용했다. 반공 극우세력을 압박만 하는 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을 유인하는 방식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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