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온도 차

지난달 20일 여야가 방송법 개정과 관련한 잠정 합의안을 만들었다. 민주당이 2016년 당론으로 발의했던 방송법 개정안의 쟁점 사항은 공영방송 KBS와 MBC의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것이다. 이번 개정 합의안은 공영방송 이사를 13명으로 늘려서 여당 7명, 야당 6명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특별다수제가 적용되는 공영방송 사장 선임을 위한 이사진 추천 비율은 당초 2/3에서 3/5로 수정하기로 했다.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시민사회와 언론단체들은 공영방송의 정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실질적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도록 한목소리를 내왔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국민의 대표성을 고려하여 100명 이상의 홀수로 구성된 사장추천위원회 설치를 제시하였다. 이사회의 경우, 정치적 영향력을 받지 않는 소속 구성원과 방송 관련 학계가 추천하는 사람이 전체 이사진의 3분의 1 이상이 되도록 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언론노조와 추혜선 의원은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영방송 국민추천제’ 도입을 주장하였으며, 일반인으로 구성된 이사추천국민위원회가 이사 후보들에 대한 공개 면접을 거쳐 추천하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 지난 4월24일 국회 정론관에서 언론·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과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여야 원내대표간의 방송법 개정안 합의 시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언론노조
▲ 지난 4월24일 국회 정론관에서 언론·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과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여야 원내대표간의 방송법 개정안 합의 시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언론노조
이러한 기대와 달리 여·야는 이번 방송법 개정안을 정치적 거래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국민투표법, 추경, 드루킹 특검 등으로 멈춘 국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방송법 개정 합의를 서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여‧야간 정치적 지분을 주고받는 식으로 법 개정을 함으로써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막아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공영방송을 둘러싼 정치권의 이러한 핑퐁게임은 결국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도구화, 공론의 장의 변질을 더 정당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시민단체와 방송사 노조는 정치권의 행태에 대해 촛불 시민의 요구를 묵살하고 방송법을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공영방송 정상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공영방송의 주인은 정치권인가 시민인가?

공영방송을 둘러싼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마치 가짜가 진짜 주인 노릇 하는 꼴이다. 법적, 제도적 근거를 따져 보면 분명 공영방송의 주인은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이다. 공영방송의 재정적 존립 근간은 공영방송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정체성과 역할이 부여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999년 헌법재판소는 ‘수신료는 공영방송사업이라는 특정한 공익사업의 경비조달에 충당하기 위해 부과되는 특별부담금’으로 법적 성격을 규정하였다. 즉, 수신료는 국회와 행정부가 관리 집행하는 국가재정법에 속하지 않으며,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TV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수상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가정에 부과되는 부담금이다. 그러므로 사후 사업 결과를 방송통신위원회와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여, 예산집행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방송문화진흥회법 어디를 보아도 MBC의 최다출자자인 방송문화진흥회가 국가 기관이라는 내용도 없다. 방송문화진흥회는 공익적 민간기구이다. 다만, 일정 정도 공적 감시를 위해 이사장이 국회에 출석하여 진흥회의 소관 사무에 관하여 의견을 진술할 수 있으며, 국회가 요구할 때에는 출석하여 보고하거나 답변하도록 하고 있다.

▲ 공영방송의 재원은 시민들이 내는 부담금과 광고료이다. 시민들이 공영방송의 투자자들이며 주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영방송의 운영에 대한 결정권도 시민의 손에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법적 근거 없이 국회와 정치권이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정치적 진영논리 속에 몰아놓고 노예화해왔다. 사진=민언련
▲ 공영방송의 재원은 시민들이 내는 부담금과 광고료이다. 시민들이 공영방송의 투자자들이며 주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영방송의 운영에 대한 결정권도 시민의 손에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법적 근거 없이 국회와 정치권이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정치적 진영논리 속에 몰아놓고 노예화해왔다. 사진=민언련
결국, 공영방송의 재원은 시민들이 내는 부담금과 광고료이다. 시민들이 공영방송의 투자자들이며 주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영방송의 운영에 대한 결정권도 시민의 손에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법적 근거 없이 국회와 정치권이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정치적 진영논리 속에 몰아놓고 노예화해왔다. 입법부 스스로가 범법행위를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법 개정안은 이 범법행위를 정당화시켜 정치권이 공영방송의 주인이 되겠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여야의 합의는 법조문에 명문화해서 정치권력이 방송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라며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부담은 시민이 하고 주인 노릇은 정치권이 하겠다는 행태는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송법 개정, ‘정치권’ 아닌 ‘시민 중심’으로 이뤄져야

이제 공영방송을 시민에게 돌려줘야 할 때이다. 시민의 대의를 반영하여 공영방송을 운영할 경영진과 관리자들이 시민들과 언론 당사자들의 손에 의해서 선출돼야 한다. 정치적으로 왜곡된 공영방송 지배구조로 인해 방송의 과잉 정치화가 심화되고 그 결과로 공공 장은 정치세력들이 점령해야 할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공영방송은 다변화하는 사회현실, 다양한 시민의 요구와 사회의 다원성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저 시민들에게 재미있는 드라마 혹은 오락물 정도나 제공하는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처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 시청자들과 시민들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 간의 질적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지난해 8월25일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돌마고) 불금파티에 참석한 시민들이 ‘세상을 밝히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 지난해 8월25일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돌마고) 불금파티에 참석한 시민들이 ‘세상을 밝히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사유지와 개인 건물들이 가득 찬 도시에서 누구에게나 휴식의 공간과 상쾌한 그늘을 제공하는 공원이 필요하듯이 상업방송이 지배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공정하고 투명하며, 시민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표현되는 공영방송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헌법 정신에도 어긋나는 법 개정을 통해 공영방송의 주인 노릇을 정당화하려는 정치권은 진정으로 각성해야 한다. 여론은 정치사회나 관료사회의 영역이 아니다. 여론은 시민사회의 영역이다. 따라서 여론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공영방송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번 방송법 개정은 반드시 공영방송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 이 칼럼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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