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판문점의 미래도 바뀔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이 이뤄질 경우 휴전 중 협상 장소였던 판문점의 성격도 바뀌기 때문이다.

판문점의 이름은 원래 ‘널문리’였다. 임진강 지류인 사천강에 널빤지 다리가 있었다는 이유로 널문리라고 불렸던 설이 있다. 첫 휴전 회담은 지난 1951년 7월 개성에서 열렸다. 유엔군 측은 북측의 점령지역이었던 개성에서 휴전 회담을 열자는데 합의했지만 이동 과정에서 안전을 고려해 남쪽으로 휴전 회담 장소를 이동해줄 것을 요구했고, 널문리 주막 앞 콩밭이 회담 장소로 정해졌다. 1951년 10월22일 이곳에 임시 천막이 세워졌다. 중국 측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표기해 판문점으로 부르면서 ‘휴전 회담 장소’로 주목을 받았다.

한국 전쟁 중 판문점에서 회담은 765번 이뤄졌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은 1953년 7월27일 열렸고, 12분 만에 끝났다. 이후 판문점은 전쟁을 일시 중단한 상태에서 남북 회담 장소로 쓰였고 소리없는 총성의 대결의 장이 됐다.

지난 1968년 1월23일 북이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면서 전쟁 위기가 닥쳤다. 당시 북한과 미국은 28차례 비밀협상을 벌였다. 북이 11개월 만에 미국 승무원 82명을 돌려보낸 장소가 판문점이다.

▲ 판문점 군사분계선 군사정전위 남측 지역에서 남한 경비병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사진=김현정 PD
▲ 판문점 군사분계선 군사정전위 남측 지역에서 남한 경비병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사진=김현정 PD
한때 판문점은 남북 화해의 상징이기도 했다. 1972년 한국 전쟁 이후 남북은 처음으로 정부간 합의문을 내놨다. 7·4 공동성명이다. 남북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 비방 중상 금지, 다방면적 교류 실시, 이상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 직통전화 설치 등을 합의했다. 남북은 1972년 6월 중순부터 판문점에서 실무접촉을 갖고 공동성명 문안을 작성했고 그해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각각 발표했다. 이후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됐고 첫 회의는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에서 열렸다.

지난 1976년까지 남북 경비병과 출입자들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지만 그해 발생한 도끼 사건(북한 초소를 가린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 장교 2명이 북한군의 도끼에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관할구역이 분할됐다.

이처럼 ‘평화적인 최종의 해결이 이뤄질 때까지 모든 적대행위와 군사행동이 중지된 정전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로 통해왔던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변모하게 될지 주목된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는 “서울에서 52km, 평양에서 147km, 개성공단에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판문점은 1951년 국제연합군과 북한국의 휴전회담이 개최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졌다”며 “남북 간 합의로 판문점이 2018 남북정상회담 개최 장소로 결정됨에 따라 분단의 고통이 시작된 곳에서 평화의 새싹을 틔워낼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4월26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이번 정상회담이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열리게 된 것에 대해 “이번 정상회담은 우리 측에서, 다음에는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이런 식으로 정상회담의 정례화가 될 수 있는 계기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판문점이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바뀌기 위해서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떤 식으로든 종전선언에 버금가는 합의를 내놔야 한다. 양 교수는 “남북이 종전 선언에 대해서 인식을 같이 하고 앞으로도 선행하도록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이 정도만 나오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이어질 북미정상회담도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에 어떤 보상 방안을 북측에 내놓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유엔안보리를 통한 체제 안전 보장을 결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두 사람의 통 큰 결단 속에서 비핵화를 하는 것이고 이행은 한꺼번에 되기 어렵다. 단계적으로 이행하고 최대로 축소해 압축적으로 이행해야 할 것”이라며 “북한의 행동과 국제사회의 보상도 행동 대 행동방식으로 접점을 찾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참고자료-70년의 대화(김연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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