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김상조, 이하 공정위)를 비롯해 5개 정부 부처가 고 박환성·김광일PD 사망 이후 방송계 불공정을 개선하겠다며 지난해 말 대책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문제 제기를 공정위가 외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 박환성PD는 지난해 5월 공정위에 ‘EBS가 독립제작사·독립PD에게 저지른 갑질’에 대해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고 당시 박PD가 이에 항의했던 것이 최근 확인됐다. 또한 지난해 7월 박PD 사망 이후에도 유족이 문제 제기를 이어갔지만 공정위가 유족에게 조사 경과조차 알려주지 않는 등 소극적 태도를 보인 것도 확인됐다.

박PD의 동생 박경준씨는 “문제의 심각성이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수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해당 민원에 대해 시간 끌기만 하고 있다”며 “최근 박PD의 이메일을 봤는데, 사람이 죽었는데도 정부 기관과 담당자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디어오늘은 유족 동의를 얻어 박PD가 사망 전 공정위 관계자와 주고받았던 이메일 내용을 공개한다.

▲ 공정거래위원회
▲ 공정거래위원회

박환성PD, 9개월 전 공정위에 첫 신고

박PD는 지난해 7월5일 공정위 서울지방공정거래사무소 소속 이아무개 서기관에게 보낸 메일에서 “암만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씀하시지만 제가 첫 신고를 한 날이 5월15일이고 이제 7월입니다”라며 조사가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박PD가 EBS의 갑질 문제를 공정위에 처음 알린 시점은 지난해 5월15일, 무려 9개월 전이었다.

이 서기관이 박PD에게 처음 메일을 보낸 건 지난해 6월14일이다. 이 서기관은 “공정거래법에 따른 분쟁 조정은 하도급법 등과 달리, 공정위가 직권으로 분쟁 조정을 신청할 수 없다”며 “번거롭겠지만 말씀드렸던 것처럼 분쟁 조정 절차를 미리 진행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신청서를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이어 신청서의 제목을 ‘한국교육방송공사의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 관련 분쟁 조정 신청’으로 하고 그 외 내용을 포함해 신청서 형식에 대해 안내했다. 메일에 따르면 이 서기관은 메일을 보내기 직전 박PD와 전화 통화도 했다.

2017년 6월 국민신문고에도 ‘EBS 갑질’ 폭로

열흘 뒤인 지난해 6월24일 박PD는 국민신문고에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독립제작사/독립PD를 상대로 벌여온 오래된 적폐”라는 제목으로 민원을 신청했다.

해당 민원에 따르면 박PD(1인제작사 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는 자신이 제작할 2016년 EBS 다큐프라임 ‘야수의 방주-2부작’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전파진흥협회(RAPA)에서 1억2000만 원의 제작지원금을 받기로 했다. 이때 EBS가 해당 정부 지원금을 협찬으로 간주해 지원금의 40%를 요구했다. EBS는 RAPA에 ‘모든 저작권은 방송사업자에게 양도한다’라고 협약서 수정도 요구했다.

박PD는 민원에 “(EBS가) 국고보조금을 사기업에나 적용할 법한 협찬으로 규정한 근거가 뭔지 등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라고 EBS에 요청했지만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 지난해 6월 박환성 PD가 국민신문고에 올린 민원 중 일부.
▲ 지난해 6월 박환성 PD가 국민신문고에 올린 민원 중 일부.

박PD는 2009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콘텐츠진흥원에서 제작 지원을 받았을 때 EBS가 ‘변경합의서’를 내밀었는데 거기엔 ‘갑(EBS)’이 ‘을(박PD)’에게 제작 지원액의 60%를 차감하고 지급한다고 돼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박PD는 “정부 지원금은 모두 작품 제작에 사용돼야 하며 증빙·회계감사까지 받아야 하는데 40%나 방송사에 주고 나면 어떻게 보고하라는 것이냐”며 사실상 “연출자와 제작사 대표를 모두 범법자로 만드는 (방송사 내부) 규정을 버젓이 시행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PD는 해당 민원에 ‘EBS 야수의 방주 계약서’, ‘EBS 측이 보낸 문자’, ‘변경합의서’ 등 5가지 서류도 함께 첨부했다.

해당 건은 3일 뒤인 6월27일 접수됐다. ‘처리기관’은 공정위 서울지방공정거래사무소 총괄과, ‘담당자’는 이 서기관, ‘처리 예정일’은 2017년 7월14일로 결정됐다.

앞서 지난해 6월22일 박PD는 이 서기관에게 ‘EBS가 6월15일 박PD에게 보냈던 메일’도 전달했다. 그러면서 박PD는 “저는 EBS가 저에게 계약 위반이라고 발언한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주장했다”며 양측의 입장이 정리된 언론 보도도 첨부했다.

▲ 지난해 6월22일 박환성PD가 공정위 담당자에게 보낸 이메일 중 일부.
▲ 지난해 6월22일 박환성PD가 공정위 담당자에게 보낸 이메일 중 일부.

당시 EBS의 입장은 ‘RAPA에서 박PD에게 지원한 금액은 협찬인데 박PD는 EBS에 알리지 않고 협찬을 받았으니 이는 계약 위반으로 EBS는 박 PD에게 애초 주기로 한 제작비의 일부를 주지 않아도 되며, 협찬금 배분은 EBS 내부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PD는 정부지원금과 협찬이 다르며, 계약 당시에 정부 지원 응모 사실을 EBS에 알렸으니 계약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박PD는 국민신문고뿐 아니라 공정위 담당자에게 직접, 첫 신고로부터 약 한 달 반이 지난 시점까지 사건을 자세히 알린 것이다.

다음 달인 지난해 7월3일 박PD는 이 서기관에게 “방송사가 외주(독립)의무 편성 비율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은 방송사가 저작권을 모두 가지지 못하도록 최근 방송법이 개정됐다고 하더라”며 “EBS는 그런 거 상관없이 모든 프로그램의 저작권은 EBS가 가지는 계약을 독립제작사/독립PD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부분도 같이 조사해볼 수 있을까요”라고 메일을 보냈다.

공정위 측 “빨리 처리 되지 않을 수 있다”

다음날인 7월4일 이 서기관이 “말씀주신 내용은 공정거래법 적용 사항이 있는지 확인해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어 “보내주신 분쟁 조정 신청서를 보니, 그 부분은 분쟁 조정을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 시정 조치를 구하는 신청서라서 분쟁 조정은 보내지 않고 사건 접수 하고자 한다”며 “사건 접수하면 제가 직접 조사하는데 기대하는 것만큼 사건이 빨리 처리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 지난해 7월4일 공정위 담당자가 박환성PD에게 보낸 답변 메일
▲ 지난해 7월4일 공정위 담당자가 박환성PD에게 보낸 답변 메일

그러자 박PD는 답장을 보내 사건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며 항의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전 EBS가 국민 세금인 국고 지원금을, 한품 빈틈없이 영수증 처리해 회계 처리까지 받게 돼있는, 정부에서 프로그램 제작하는 데만 사용하라는 공공자금을 방송사 간접비 명목으로 떼어가는, 독립PD들이 보기엔 상당히 위법한 행위를 방송사 내부 규정까지 만들어 10년 넘게 자행해온 일을 공정위라는 국가 기관에 신고한 것이고, 제대로 조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박PD는 공정위 쪽 안내에 따라 분쟁 조정으로 접수했는데 이제 와서 접수 형태를 바꾸겠다는 답변을 받은 것이다. 박PD는 “얼마 전 전화에서 신고보다는 분쟁 조정 쪽으로 진행하면 2달 안에는 어떤 식으로 (결론이)날것이라 해서 그렇게 해주십사 한 것인데, 그럼 아직 조사도 안 들어갔다는 것이고 시정 조치라는 것으로 새로 접수를 하신다고요? 무슨 폭탄 돌리기 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지적했다.

박PD 입장에서는 공정위가 초기에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거나,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PD는 “암만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씀하시지만 제가 첫 신고를 한 날이 5월15일이고 이제 7월”이라며 “처음 제 신고를 접수한 담당자는 신고가 들어오면 10일 안에 피신고측(EBS)에 확인 조사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직 조사조차 안 들어갔다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니라 이 사안에 대한 조사 의지가 별로 없으신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PD는 같은 메일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이 바뀌었지만 달라진 게 없다며 실망감도 나타냈다.

이는 박PD의 마지막 메일이 됐다. 3일 뒤인 7월8일 박환성·김광일 두 PD는 ‘다큐프라임-야수의 방주’를 찍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국했다.

▲ 촬영 중인 박환성 PD. 사진=박환성 페이스북
▲ 촬영 중인 박환성 PD. 사진=박환성 페이스북

7월14일 이 서기관은 국민신문고에 “사건으로 착수돼 조사 중”이라고 답변을 달았다. “심사가 완료되는 대로 ‘관련 법률’에 따라 법 위반이 있으면 경고·시정조치·과징금 납부 등, 법 위반이 없으면 무혐의, 법 적용 대상이 아니거나 피조사인(EBS)이 사망·폐업 등으로 시정 조치 등이 불가능한 경우는 심사불개시·종결처리·조사중지 등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내용도 이어졌다.

남아공 현지시각 7월14일 오후 8시45분(한국시각 15일 오전 3시45분) 두 PD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독립PD협회 측이 7월18일 그들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았다.

박PD의 동생 박씨는 지난 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내가) 9~11월에 해외출장 다녀온 뒤 12월경 공정위에 전화했더니 ‘사건 당사자가 없어졌다, 중지됐다’는 말만 들었고 조사경과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내가 누군지도 밝혔고, 당시 언론 보도도 많았으니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라며 당시 공정위 측 반응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공정위를 비롯해 방송통신위위원회·문체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고용노동부는 합동대책반을 구성하고 실태 조사와 현장 점검을 진행한 뒤, 지난해 12월19일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박씨는 지난달 8일 민원 신청자를 박환성 전 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에서 박경준 현 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로 변경하는 요청서를 공정위에 보내 “EBS에 대한 진상조사를 촉구한다”고 했다. 박씨는 ‘야수의 방주’ 후속 문제를 해결하고 형의 뜻을 받들기 위해 형이 운영하던 제작 법인을 이어받았다.

현재 유족과 EBS는 두 PD에 대한 보상금 문제만 법원을 통해 마무리했을 뿐 EBS 주장처럼 박PD가 계약 위반을 했는지 등에 대한 진상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자연스레 재발 방지 대책도 논의되지 못했다.

박씨는 “최근 EBS와의 협상 등을 위해 형의 이메일을 검색하다 공정위 관계자와 주고받은 메일을 발견했다”며 “(형이) 실망하고 좌절한 내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정위에 민원 신청자 변경을 요청한 지 한 달이 지난 2월8일 박씨는 이 서기관에게 메일을 보냈다. “오늘에야 이 글(메일)을 보고 알게 됐는데 원래부터 이 사건을 질질 끄셨군요. 제가 전화했을 때도 아직 조사 중이니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란 말만 하고. 관련 사건으로 사람이 죽었는데 달라진 건 없고.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난 박환성 PD랑 다릅니다. EBS, 공정거래위원회, 담당 서기관 절대 그냥 안 넘어갑니다.”

미디어오늘은 이에 대한 이 서기관의 입장을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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