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집행유예를 둘러싼 ‘유전무죄’ 비판이 확산되는 가운데, 언론계는 이와 선명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전국단위종합일간지와 주요경제지 16개 중 이 부회장 항소심 선고를 비판한 언론사는 단 2곳이다. 대다수 언론은 특검이 증거없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기소했고 2심 재판부가 법리와 상식을 바로 세웠다고 평가했다.

전국단위종합일간지 10곳과 경제지 6곳의 6일자 사설을 보면 경향신문과 한겨레 2곳만 2심 선고가 삼성 측 변론에 치우친 ‘재벌 봐주기’ 판결이었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 6일 경향신문 및 한겨레 사설
▲ 6일 경향신문 및 한겨레 사설

경향신문은 사설 ‘이재용 집행유예는 재벌 봐주기, 납득 못한다’에서 “세계 굴지의 재벌이라도 법과 상식에 통하지 않는 경영을 하면 지탄의 대상이 되고 그에 응당한 처벌도 감수해야 한다”며 “그런데 이번 판결은 정경유착을 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고 평가했다.

‘이재용 ‘솜방망이 판결’, 유전무죄 부활인가’라는 사설을 실은 한겨레는 “이미 언론을 통해 일지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국민들의 법감정과는 동떨어진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증거법 원칙’이 왜 유독 삼성 사주들에게만 대를 이어 적용되는지, 36억원 횡령·뇌물공여 혐의를 인정하면서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이 과연 적정한 형량인지도 의문”이라며 “아마도 국민들에게는 희대의 ‘유전무죄’ 판결로 기억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삼성 미소, 국가 웃음으로” 낯뜨거운 문구

나머지 14개 사설을 종합하면 요지는 크게 △특검 기소에 대한 비판 △여론 재판 규정 △이 부회장 경영 복귀에 대한 기대감 등 3가지로 정리된다.

▲ 6일 매일경제·서울경제·전자신문 사설 제목
▲ 6일 매일경제·서울경제·전자신문 사설 제목

경영 복귀 기대감과 관련된 사설로는 ‘이재용 이제는 앞만 보고 뛰어라’(서울경제), ‘삼성의 미소, 국가경제 웃음으로 이어져야’(전자신문), ‘삼성은 심기일전해서 글로벌 정도 경영에 매진하길’(매일경제)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매일경제는 삼성그룹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에 대해 “이 부회장 부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지난 1년간 삼성은 글로벌 인수·합병 시장에서 구경꾼에 머물렀다”면서 “이 부회장 앞에는 이런 비정상을 조속히 정상화시켜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심기일전을 기대한다”고 썼다.

서울경제는 삼성전자에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맞서 삼성 특유의 스피드 경영을 되살리고 신수종사업 발굴과 글로벌 인수합병에도 속도를 내야 할 것”이라며 “투자를 늘리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삼성의 사회적 역할이자 국민이 보내준 성원과 격려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언론사는 같은 날 다른 지면 기사에서도 이 부회장이 고용·투자 등을 늘려 한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이 부회장의 석방을 한국경제 활성화에 직접 연결시키는 프레임이다. 구속 중에 지펴진 ‘삼성그룹 위기론’이나 ‘국가경제 위기론’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재벌 총수 1인에 대한 선고 결과와 한국 경제 활성화 사이엔 직접 인과관계가 없다. 대기업 경영은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 조직을 기반으로 이뤄질 수 있고 투자·고용 증대는 재판 선고 결과와 관계없이 이뤄질 수 있는 의사결정이다. 증명된 선례도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3년 구속됐고, 이재현 CJ회장이 2014년 징역 4년 선고를 받았으나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체감하기 어려웠다.

“특검이 증거없이 기소했다”는 지적은 14곳 신문 사설에서 동일하게 나왔다. 증거없는 기소는 특검이 법리가 아닌 여론에 의존했다는 논리로 귀결됐다. ‘이재용 집유… 특검 여론수사에 法理로 퇴짜놓은 법원’(동아일보), ‘무리한 起訴와 '1심 여론裁判' 바로잡은 이재용 2審’(문화일보), ‘특검의 ‘누더기 기소’에 제동 건 이재용 2심’(한국경제) 등이 대표적이다.

동아일보는 특검 수사에 대해 “권력자의 요구에 마지못해 돈을 준 기업을 전형적인 뇌물사건의 부패 기업처럼 취급했다”며 “그렇게 여론몰이를 하면서 한편으로 여론에 끌려다녔다”고 비난했다.

한국경제는 더 나아가 “처음 기소 때부터 가정과 추정, 정황 논리가 공소장을 지배했고, ‘걸리기만 해라’는 식의 무리한 법 적용이 적지 않았다”며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포퓰리즘 기소’도, 전(前)근대적 ‘원님 재판’ 논란도 더는 없기 바란다”고 했다.

특검은 재판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을 포함한 청와대 비서관들 업무수첩, 독대 당시 대통령 말씀자료, 청와대와 삼성그룹 관계자 간 통화기록, 피고인 장충기·박상진의 휴대전화 포렌식 자료 등 2만 쪽이 넘는 증거를 제출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의 경우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의 대화 기록, 국민연금관리공단 관계자들의 외압 사실 증언 등은 국민연금의 합병 동의가 비정상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줬다. ‘증거가 없다’는 이들 언론의 근거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 6일 동아일보·문화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한국경제 사설 제목
▲ 6일 동아일보·문화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한국경제 사설 제목

“정경유착 없다” 판결 ‘복사·붙여넣기’

“정경유착이 아니”라는 항소심 판결 내용은 언론에 그대로 실렸다. 한국경제는 2심 판결이 “‘뇌물공여사건’의 실체를 확인시켜준다”며 “정치권력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기업의 수난이 이 사건의 본질이었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사설 ‘이재용 사건, 피해자를 범죄자 만든 것 아닌가’에서 “이 부회장이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의 겁박을 거부하지 못해” 뇌물을 제공했다는 2심 판결 요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재계 서열 1위 총수가 최씨와 관련된 기관 4곳에 1년 동안 298억원 상당을 지급한 사실을 대통령 강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법원에는 아직 법과 양식을 우선하는 꼿꼿한 판사들이 있었다. 2심 판사들도 온갖 공격을 당할 것이다”며 “그래도 우리 사회를 받치는 기둥이 아직은 건재하다고 느낀다”고 평했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집행유예를 받았는데 무죄처럼 보도하는 게 우선 왜곡됐고, 국민 감정이 사법부를 개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며 “환희에 찬 일부 표현을 보면 언론이 또 하나의 가족인 것만 같다. 삼성이 모종의 방식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국민들이 결코 모르지 않을 것이란 걸 삼성과 언론이 알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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