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단 10분만 손에서 내려놓고 옆에 있는 엄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엄마의 하루 컨디션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을 조금 더 들여 지켜보면 엄마가 내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거기에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
-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121~2p 하윤재 판미동>
단편영화 ‘봄날의 약속’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제 첫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하윤재(45) 영화감독. 그가 치매에 걸린 엄마(82)와 함께 보내온 지난 10여년의 이야기를 풀어 놓은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를 읽다보면 때로는 가슴 저리지만 의외로 유쾌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구절이 더 많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 멀리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가에, 허리 굽은 노모를 부축하며 마실 나온 딸이 보인다.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이규태 작가가 그린 파스텔톤의 표지를 넘기면 묵직한 다음 글귀와 마주하게 된다.
‘치매환자의 기억은 시간, 장소, 인물 순으로 소멸된다. 시간 상실의 1기, 장소 상실의 2기, 인물 상실의 3기, 즉 말기. 1기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엄마의 기억은 어느새 말기에 다다랐다. 자신의 삶을 하나둘 잊어가는 모습을 보며 엄마를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이 책을 세상에서 나와 가장 오랜 인연인 엄마에게 바친다.’
그는 기대수명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우리에게 ‘치매’라는 병과, 치매 환자 가족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난 수요일 서울 광화문 한 프랑스식 찻집에서 하 작가를 만났다.
40대 중반의 비혼인 하 작가는 2007년 함께 살던 엄마가 맛있게 만들던 나물무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상을 감지했다. 이후 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했고, 치매 초기진단을 받은 후 10년 동안 치매 진행을 최대한 늦추는 치료와 돌봄을 해오고 있다. 하 작가는 치매국가책임제와 요양보호제도가 많이 개선되어 치매환자 가족들이 사회 생활을 유지하며 환자를 돌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본인의 경험과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들려주었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 어머니 근황은 어떤지.
“혈관에 이상이 생겨서 오는 알츠하이머 치매(3등급)로 10년 전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시간 관념이 흐려지는 1기였는데 지금은 3기 초기(인물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예요. 우리나라 치매환자의 70%가 알츠하이머 치매고 파킨슨병은 상대적으로 적어요.
평생 살던 방배동 집을 팔고 지금은 아버지의 고향인 하동에 새 집을 지었어요. 아버지와 둘이 내려가 계시는데 식사 후 30분 이상 햇볕을 쬐며 산책을 시켜달라고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께 권유합니다. 약간의 언덕이 있고 조금은 숨이 찰 정도까지 엄마를 걷게 할 수 있는 집 주변 산책 코스를 정해드렸어요. 어머니는 힘들다고 하시지만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다니면서 중간에 쉬더라도 그 언덕을 많이 걸으라고 말씀드려요. 식사를 잘하고 40분 운동 갔다 오면 오전에 흐릿하던 눈빛이 또렷해지는 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노망’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면서 불치병으로 생각하고 환자 가족들이 손 놓고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 실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악화를 늦추면서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병이 치매이며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쉽게 요양병원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가족이 돌보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요. 어머니는 현재 너무 잘 지내고 계셔요.”
- 하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왔나요.
“5남매중 막내딸로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첫째, 둘째 언니오빠에 비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힘든 걸 모르고 자랐어요. 장난끼가 많은 아이였고 자라서 꿈은 만화가게 사장님이었지만, 졸업장은 따고 뭘 하던지 하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대학에 가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죠. 하지만 이내 대학에 실망하고 왜 인생을 다 똑같이 살아야 되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대학교때 별명이 ‘신문지’였어요. 수업은 잘 안 들어가고 도서관 앞에서 신문 깔고 누워있다가 친구들 기다리면서 신문 하나 다 읽고. 수업 끝나고 나오는 친구들이랑 밥 먹고 영화 보러 가곤 했어요.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4년 다니다가 꼭 해보고 싶었던 영화판에 기획팀 막내로 뛰어들었어요. 주변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직접 감독으로 나서 찍은 단편 ‘봄날의 약속(2009)’이 프랑스 끌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초청을 받은 후 첫 장편을 3년 동안 준비하다가 엎어지는 힘든 시기도 겪었구요.
요즘 함께 광고회사 다니던 친구들 만나면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받으며 가정을 꾸리고 차를 갖고 있고 내게 밥을 사지만, 얘기 나누다 보면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나인 것 같더라구요.”
-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다이어리와 시나리오를 쓰던 A4지에 엄마를 돌보는 얘기를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가까이 지내던 안귀여루 교수님이 우연히 그 글들을 보고 이 글의 목적이 뭐냐고 묻길래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거다’라고 했더니 출판을 권유했어요. 다 완성될 무렵 웬만한 큰 출판사들에는 모두 이메일로 돌렸어요. 대부분은 ‘기획팀에서는 출판가치는 있다고 하는데 유통쪽에서 돈이 안된다고 반대를 했다’는 답이 왔죠. 유일하게 판미동(장미 대리)에서 책을 내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들은 이 책이 단기적으로 많이 팔릴 책은 아니지만 길게 보면, 읽은 사람이 주변에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얘기했어요. 삽화를 그린 유명 일러스트 이규태 작가도 처음엔 너무 무거운 주제라며 작업 맡기를 주저했는데 판미동에서 원고를 읽어보길 권유했고 그 후 수락했다고 해요. 이규태 작가는 ‘이 책은 치매 얘기라기보다 딸과 엄마에 관한 얘기’라고 했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