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영 사장은 지난해 말 해임당한 김장겸 MBC 사장과 함께 공영방송 적폐세력의 ‘대표’로서, 사내에서는 부당노동행위를 일삼고, 매체를 통해서는 청와대나 국가정보원의 블랙리스트와 ‘지침’에 따라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피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부기관들이 저지른 ‘댓글사건’ 등에 관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보도를 기피함으로써 국민의 공공재인 전파를 사유물처럼 악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KBS 본부(새노조)와 MBC 본부의 언론노동자들은 사장과 이사장을 퇴진시키기 위해 지난해 9월4일부터 기나긴 파업을 벌였다. MBC가 72일, KBS는 무려 142일이었다. 안철수는 KBS의 파업이 승리로 끝난 지 나흘 뒤에 위와 같은 주장을 했다.
안철수는 지난해 8월31일, KBS 1TV ‘뉴스집중’에 출연하러 서울 여의도 사옥에 간 자리에서 성재호 새노조 본부장이 “이번 주부터 KBS 본부 노동자들이 제작 거부하는 거 아시죠? 다음 주에는 총파업을 합니다”라고 말하자 “알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고 국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잘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많은 언론매체가 안철수의 ‘총파업 지지 의사’를 보도했다. 같은 해 11월 안철수는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과 함께 포항 지진 피해 모금을 위해 특별 편성된 KBS 프로그램에 나와 성금을 전달했다. “재난 피해 모금 방송은 고대영 없는 KBS에서” 등 피켓을 든 새노조 조합원들이 안철수에게 “우리는 지금 파업 중”이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그는 KBS 파업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방송 적폐’의 시작이라며 오히려 고대영 해임을 재가한 문재인에게 화살을 날렸다. 게다가 그는 “여권 편향 방송이 차고 넘친다”는 극단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말 김장겸 MBC 사장과 그리고 올해 들어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해임당한 뒤 정상화의 길로 접어든 MBC, 근자에 사내 혁신에 부분적으로 성공한 SBS, 종합편성방송인 JTBC, TV조선, 채널A, MBN 등 가운데 어느 곳이 ‘여권 편향 방송’이라는 말인가? 안철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어디가 비교적 공정한 방송이고 어디가 상대적으로 불공정한 방송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시했어야 한다. 그는 최근 퇴출당한 ‘KBS의 적폐사장’을 두둔한 것만으로도 정치지도자의 자질이 없음을 입증했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갈수록 심해진 공영방송의 적폐에 관한 인지(認知) 부조화도 그의 현실 파악 능력이 한참 모자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철수는 2013년 4월24일 실시된 서울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므로 그의 정치 경력은 올해로 5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지난 5년을 살펴보면 안철수는 어느 당에 가든지 화합이나 공존과는 거리가 먼 노선을 달려왔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근혜가 파면당한 뒤 지난해 5월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나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도 뒤져 3위로 낙선한 안철수는 이렇다 할 반성이나 자기성찰도 없이 정치 일선에 복귀해 다시 국민의당 대표가 된 뒤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등 호남 출신 의원들과 갈등 관계에 빠졌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바른정당과 통합하기 위해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와 대화를 거듭하며 ‘찰떡 궁합’을 과시하더니 마침내 지난 18일 공동으로 ‘통합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낡은 지역주의를 극복하여 동서가 화합하고 통합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인지, 안철수와 유승민은 호남과 영남을 함께 방문하며 ‘건전한 개혁보수와 합리적 중도의 힘’으로 ‘구태정치를 결연히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겠다’고 외쳤다.
소속 의원이 9명으로 줄어든 바른정당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국민의당 통합파와 손을 잡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남과 김대중 정신 계승’을 열심히 외쳐온 안철수가 반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그런 정신과는 거리가 먼 바른정당과 통합하려는 것은 호남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의 주권자들이 보기에도 그릇된 정치적 행태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호남은 역사적으로 지배권력의 압제와 핍박에 시달려 왔다. 조선왕조 시대에 자주 일어난 민중봉기들 중에서도 특히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호남 정신을 대변하는 사건이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김대중은 1950년대에 정계에 발을 내디딘 이래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가 하면, 1980년 5월에는 전두환 일파의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은 바 있다. 정계 입문 이전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적이 전혀 없는 안철수가 김대중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 특히 김대중은 집권 기간에 공과가 아울러 있지만, 2000년에 이루어낸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민족의 화합과 공존을 위한 길을 활짝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안철수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가 ‘6·15 선언’과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안철수는 주권자들에게 생산적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런 저런 정당에서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드러났다. 그에게서는 진취적 역사의식이나 인문·사회과학에 관한 이렇다 할 만한 지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요즈음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음으로써 극우보수언론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생산이 아니라 파괴를 일삼는 인물이 정치지도자로 특정세력을 이끌려는 것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 늦기 전에 안철수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