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실명제의 망령이 부활할 기세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인터넷 댓글 실명제’ 법안을 발의했다. 인터넷 실명제는 과거 위헌 결정을 받은 데다 정책의 효과는 없고 부작용만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무리수’ 법안이 나온 것이다.

장제원 의원은 지난달 28일 권성동·김석기·김성태·김현아·박성중·여상규·이진복·이철우·주광덕 의원과 함께 인터넷 실명제를 골자로 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하루 이용자 1000만 명 이상인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의 댓글 서비스에서 본인확인조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포털 댓글 실명제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법안이 나오면 치열한 논의가 이어지는 게 바람직하지만 이 법안은 이미 명확한 결론이 난 상태다. 과거 헌법재판소가 ‘인터넷 실명제’ 위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일간 접속자 10만 명 이상의 사이트 게시판에 글을 쓸 때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게 하는 인터넷 실명제는 2007년 도입됐다 2012년 폐지됐다.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사회의 문제제기에 이어 2010년 미디어오늘이 위헌 심판을 청구한 결과다.

▲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민중의소리.
▲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민중의소리.
시민단체 오픈넷은 지난 15일 입장문을 내고 장제원 의원의 법안을 가리켜 “인터넷 실명제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위헌결정의 ‘기속력’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헌재 결정은 강제력을 갖기 때문에 헌재 결정을 무력화하는 입법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인터넷 실명제는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 △개인정보 자기 결정권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언론자유를 침해한다. 인터넷 실명제와 장제원 의원 법안은 대상 업체, 실명 대상 게시글 유형만 다르고 기본적인 속성은 같기 때문에 헌재의 판단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장제원 의원은 “비방·모욕·욕설 등 악성 댓글로 인한 타인의 인격권에 대한 침해 등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표현의 자유 침해보다 인격권 침해에 대한 대응을 우선시했다. 그의 말처럼 악플 문제는 심각하고 개선돼야 하지만 인터넷 실명제로는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는 핵심을 간과하고 있다.

201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우지숙 교수 연구결과에 따르면 비방 게시글이 실명제 이전 13.9%에서 실명제 이후 12.2%로 줄어들어 차이가 미미했다. 그런데 글을 게재한 사람의 수(IP 기준)는 2585개에서 737개로 급감했다. 악플 감소는 미미한 반면 멀쩡한 댓글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정책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채 자기검열만 일상화된 것이다. 미디어오늘의 경우 2010년 인터넷 실명제 적용 직후 댓글이 20%가량 감소했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 이후 본인확인을 위해 기업들이 개인정보를 보관하다보니 유출 위험이 커진 역효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옥션, GS칼텍스, 신세계 등에서 각각 1000만건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헌재 결정에서도 대량 개인정보유출사태에 대한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포털이 지금보다 더욱 광범위한 개인정보를 보관하게 되면 피해의 위험성도 비례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 댓글 실명제’는 국경이 있지만 인터넷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적지 않은 누리꾼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소통하는 시대지만 인터넷 댓글 실명제는 국내 포털만 규제할 것이고 이는 ‘역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과거 인터넷실명제 도입 이후 다음TV팟, 판도라TV의 방문자수가 급감한 것도 우연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 일러스트=권범철 만평작가.
▲ 일러스트=권범철 만평작가.
댓글 실명제는 이미 무력화되기도 했다. IT전문매체 블로터가 인터넷 실명제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실명제 적용을 받지 않는 서비스를 댓글처럼 기사 하단에 띄우는 ‘소셜 댓글’을 선보이면서 익명댓글을 제공한 바 있다. 포털이 이 같은 ‘저항’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인터넷 댓글 실명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무력화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장제원 의원의 법안은 대상이 불분명한 것도 문제다. ‘댓글’이 규제 대상인데 오픈넷은 “‘댓글’에 대한 정의가 없어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위반되며 결국 모든 게시글에 대한 본인확인조치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규제 대상을 하루 1000만 명 이상 서비스로 규정한 것 역시 명확한 근거가 없다.

지금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인터넷 실명제 부활이 아니라 인터넷 실명제가 폐지됐음에도 모순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선거기간 인터넷 실명제’도 폐지하는 것이다. 선거 기간은 ‘공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있고 미디어오늘, 직썰, 비마이너 등 언론은 선거 기간 댓글창을 폐쇄하며 항의하고 있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2015년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선거기간 인터넷 실명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2015년 12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김진태·김도읍 당시 새누리당 의원 등이 익명 댓글이 여론을 왜곡할 수 있다며 반발해 법안에서 인터넷 실명제 관련 조항은 빠진 채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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