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 방법은 1차 서류전형. 구비서류는 이력서·자기소개서·뉴스원고 리딩 동영상. 동영상 시간은 2분 내외. 뉴스 원고 읽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목소리 선명하게). 뉴스 원고는 MBC 홈페이지 내 MBC NEWS 참조, 카메라 앵글은 정면 샷(허리 상반신). 2차 실기전형 및 면접, 3차 최종 면접.”

2015년 12월22일 MBC 홈페이지에 올라온 ‘프리랜서 라디오 뉴스 진행자’ 모집 공고 내용이다. 당시 한 종교 관련 방송에서 뉴스를 진행하던 김형기 아나운서도 지원했다. 그는 해당 방송의 메인 뉴스인 정오뉴스를 진행하던 정규직 아나운서였다. 왜 정규직을 버렸냐는 질문에 답은 뻔했다. “누구라도 MBC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최근 10년 간 MBC는 불규칙적으로 아나운서 공채를 진행하다 2013년 이후엔 신입채용을 중단했다. MBC만의 문제는 아니다. 케이블·종합편성채널 등에는 프리랜서·계약직이 더 많고, 정규직 아나운서가 없는 방송사도 있다. 김 아나운서 역시 두 곳에서 프리랜서를 거쳤고, 종교 관련 방송사에도 계약직으로 입사해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방송계에서 프리랜서는 효율적인 ‘착취’ 대상이다. 소위 ‘프리’ 선언을 하고 소속사까지 있는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와 전혀 다르다. 협상력도, 4대 보험도 없는 ‘을’이다. 방송사의 ‘관행’이 그렇다면 게임의 룰이 공정하길 바라며 열심히 자신의 자리를 찾을 뿐이다. 그는 ‘쟁쟁한’ 경력자들과 함께 ‘캐스터’로 최종 합격했다. 채용과정에 대해 사내에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 서울 상암동 MBC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 상암동 MBC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2016년 2월 상암동으로 출근했다. 보도국에 자리가 마련됐고, 명함이 나왔다. 채용 공고에는 “뉴스 진행 능력 우수자에게는 추후 TV 뉴스 프로그램 진행 기회 부여 예정”이라고 돼있었다. 그는 보도국 간부에게 뉴스진행 관련 공개 오디션에 참여할 수 있냐고 물었다. ‘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MBC 보도국이 망가져간다는 평가가 들려왔다. 뉴스 최종 전달자로서 방치할 순 없었다. 업무일지를 써가며 그날 원고를 되짚었다. 단어 선정은 적절했는지, 어순을 바꾸면 좋을 곳은 없는지. 하루 6~7개의 뉴스를 맡았다. 힘들다는 새벽 5시 뉴스를 ‘펑크’내 본적은 없다. 사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017년 1월, 그는 MBC와 재계약했다.

정치상황이 변했고, 대통령이 바뀌었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파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MBC의 한 고위 임원이 동료 캐스터를 사석으로 불러 다음 내용을 전달하게 했다. “지금 경영진이 바뀌면 현행 프리랜서 진행자 6명이 라디오뉴스를 진행하는 시스템이 아무리 효율적이어도 유지가 어려울 것”이며 “총파업으로 라디오뉴스 외에 TV쪽에서도 업무 공백이 생기면 도와 달라”는 취지의 ‘협박성 발언’이었다. 파업 대체 인력으로 일해 달라는 뜻이었다.

계약서상으로 그는 이런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계약서에는 “‘을(김 캐스터)’은 계약기간 중 어떠한 형태의 집단적 또는 개인적인 이유로 ‘프로그램’ 출연을 거부할 수 없다”고 돼 있다.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한 프로듀서 및 연출자의 정당한 지시나 요청에 대해 거부해선 안 된다”는 조항도 있다.

‘거부’에 대한 대가도 명시돼있다. ‘계약해지’ 항목에는 “계약기간 종료 전이라도 ‘을’의 출연 프로그램이 폐지된 경우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프로그램 폐지를 명목으로 일자리를 박탈할 수 있는 것이다. ‘을’에 대한 압박은 더 있다. 계약서에는 “‘을’이 정당한 사유 없이 본 계약을 위반하는 경우, ‘갑(MBC)’은 계약을 즉시 해지할 수 있고 을은 갑에게 위약벌 200만 원을 지급한다”고 돼 있다. 또한 “‘갑’은 ‘을’에게 위약벌과 별도로 ‘갑’에게 발생한 손해 전부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김 캐스터는 그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소신을 밝혔다. 언론노조 MBC본부의 파업 첫날인 지난 9월4일 “비정규직 인력을 파업대체용으로 사용하려는 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고위 간부의 발언·계약서 등을 모두 공개했다. 일자리를 잃는 것 뿐 아니라 위약벌·손배 등의 위험을 감수한 폭로였다. 파업 국면에서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다수 프리랜서·작가 등이 파업지지를 발표했는데 김 캐스터가 포문을 연 셈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 이후 ‘기자에게 해명하고 기사 내려달라고 하라’는 말도 듣고, 법적대응을 시사하는 발언도 들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 MBC 프리랜서 뉴스진행자 “나는 파업 대체인력 아냐”]

“YTN에서 프리랜서 1기 공채로 일했어요. 2012년 (YTN 노조가) 파업 나가면서 선배들이 ‘(뉴스)부탁한다’라며 나갔어요. 암묵적으로 파업 나갈 때 뉴스를 이어갈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갈 수 있었던 거죠. 정말 뉴스가 안 나오면 (파업에 대한) 부담이 더 크니까요.”

파업 이후 일이 줄었다. 뉴스 시간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다. 뉴스 출연 1건당 페이를 받는 그의 주머니도 가벼워졌다. 그는 불안한 상황에서 더 불리할지 모르는 선택을 했다. 무너진 보도공정성을 세우기 위한 파업에 박수를 보냈다. 

▲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지난달 27일 설치한 ‘사장 후보자에게, 질문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게시판에는 방송사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방송인들의 호소가 적지 않게 담겨 있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지난달 27일 설치한 ‘사장 후보자에게, 질문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게시판에는 방송사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방송인들의 호소가 적지 않게 담겨 있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MBC 권력이 교체됐다. 하지만 오는 12월31일자로 계약만료를 앞둔 김 캐스터는 불안했다. 신임 보도국 간부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2년 간 업무를 되돌아보면 이번에도 계약이 갱신될 거란 기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14일 문자 메시지가 한통 왔다. “MBC 보도운영부입니다. 프리랜서 라디오뉴스 진행 계약이 2017년 12월31일자로 종료됨을 안내드립니다.”

라디오 뉴스진행은 복귀한 정규직 아나운서들이 맡아야 한다는 게 회사의 최종판단이다. 신임 보도국 간부들도 미디어오늘에 “인간적으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정우 신임 보도국장은 “(당시 경영진이) 아나운서들 쓰기 싫어서 새로 뽑아 계약을 한 거고, 인건비 부담이 생기니까 프리랜서 계약을 한 것”이라며 “1년 계약을 맺었다고 고용관계인 건 아니고,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프리랜서지만 1년 계약을 한 거라 비정규직 개념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2012년 170일 파업 이후 MBC는 급격히 망가졌다. 복귀한 MBC 구성원들은 방송에서 배제됐다. 노조에 따르면 200명이 넘는 이들이 징계와 보복성 인사를 당했다. 파업에 참여한 아나운서들은 당시 경영진으로부터 ‘더 이상 아나운서라는 말은 하지 마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아나운서국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괴롭힘에 못 이겨 회사를 떠난 이들도 있다.

2012년 파업 이전부터 라디오 뉴스 리딩은 MBC 아나운서들의 업무였다. 보도국은 뉴스를 만들고 아나운서국은 뉴스 진행자들이 소속된 곳이다. 그런데 2016년 안광한 사장 때 보도국 내에 ‘기형적’으로 라디오뉴스팀에 프리랜서 캐스터를 뽑았다. MBC 내부에서는 김 캐스터와 같은 인력이 2012년 파업 이후 망가진 MBC 상황에서 대체인력의 성격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게 한 국장의 설명이다.

김 캐스터와 같은 인력을 아나운서 국에서 떠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나운서국은 제작부서가 아니기도 하고, 보도국에서 뽑은 프리랜서 인력을 아나운서국에서 관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MBC 정책기획부 관계자는 “비정규직 등 처우개선에 대해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며 “감사국 조직을 정리하는 게 이번 주 목표”라고 말했다. 새로 선출된 MBC 감사는 과거 채용과정이 공정했는지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 지난 8일 엠빅비디오 화면 갈무리. 김형기 캐스터 역시 출입증 목걸이가 회색이다.
▲ 지난 8일 엠빅비디오 화면 갈무리. 김형기 캐스터 역시 출입증 목걸이가 회색이다.

김 캐스터와 신임 보도국 간부들은 이미 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했다. 법률상 ‘프리랜서 계약만료’라는 것도 안다. 언론노조 MBC본부에서도 김 캐스터의 입장을 안타까워했지만 당장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조합원이 아닌 그를 도울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김 캐스터는 “언론자유도 신분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제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났으니 공채가 없을 땐 MBC에선 일을 못하는 건지. 현장에 바로 투입하겠다며 경력 있는 사람들을 3차에 걸쳐 뽑았잖아요. 절 뽑았던 면접관들 중에는 이번 파업에 참가한 분들도 있었어요. 2년 간 보도국에서 뉴스 만들던 분들, 이번에 파업 참가한 분들이 있고요. 공정하게 경쟁해서 일할 기회를 갖는 건 불가능했나 싶네요. 전 MBC 서류상으로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전 대체인력도 아니고, 적폐뉴스를 하려 한 사람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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