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주취감경 폐지’ 국민청원 서명자가 20만 명을 돌파한 가운데, 현재 제20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법 조항은 형법 제10조 제2항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처벌을 덜어주도록 돼 있다. 이 조항 때문에 술이나 약물에 의해 심신미약 상태가 됐다고 판단하면 형이 감경되는 경우가 있었다. 2008년 8살 여학생을 성폭행·상해한 조두순이 음주 상태였다는 이유로 징역 15년에서 12년으로 감형받은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제20대 국회에서는 이러한 주취감경 내용 폐지를 골자로 하는 형법 개정안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등이 다섯 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가 멈췄다. 주취감경 조항을 일괄적으로 폐지할 경우 형법상 책임주의 원칙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책임주의는 ‘책임이 없으면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형법상 대원칙으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해 7월29일 서영교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다. 해당 개정안은 형법 제10조에 “음주나 약물(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제2조에 해당하는 약물)에 의한 심신장애자의 행위는 제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신설 조항을 추가하도록 했지만 11월22일 소위에 회부돼 검토보고서가 제출된 것을 끝으로 논의가 중단됐다.

▲ 9월26일 오전 국회 법사위 소회의실에서 제2차 법안심사1소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다. 제20대 국회에서는 주취감경 내용 폐지를 골자로 하는 형법 개정안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등이 다섯 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가 멈췄다. 사진=민중의 소리
▲ 9월26일 오전 국회 법사위 소회의실에서 제2차 법안심사1소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다. 제20대 국회에서는 주취감경 내용 폐지를 골자로 하는 형법 개정안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등이 다섯 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가 멈췄다. 사진=민중의 소리
검토보고서에는 법안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담겼다. 보고서는 신설 조항이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를 자의로(또는 스스로) 야기했는지 여부나 그 당시 범행을 예견할 수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필요적으로 책임감경을 배제하도록 하고 있다”며 “행위태양(행위의 형태)이나 심신장애의 원인·정도에 따라 구체적 타당성을 기하기 어렵고 책임주의 원칙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법무부도 “개정안에 따르면 행위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몰래 투약된 마약이나, 피해자의 강권에 따른 음주로 인한 싸움 사건, 치료 목적 약물 투약 경우에도 일률적으로 심신감경 규정 배제”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다시 말해, 해당 개정안이 불가피한 음주나 약물 투여 여부에 관계없이 처벌을 감경할 수 없도록 한 것은 책임주의 원칙 위배라는 것이다.

서영교 의원실 관계자는 “개정안에 가장 크게 반대하고 있는 것은 법원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음주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감경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일반 국민 감정인 반면, 법원은 의도치 않게 실수로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구제할 수 있도록 임의 규정으로 둬야 한다는 의견”이라며 “법사위 위원들도 거의 법조계 출신이다보니 이에 따라 다 반대를 하고 상정 자체를 안 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선 6월에는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도 비슷한 취지로 논의가 가로막혔다. 해당 개정안은 성폭력 범죄 등에 대하여 형법 제10조 제1항과 제2항의 감경규정 적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범행을 예견하고 자의로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투여해 심신장애를 야기한 경우에는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11월8일 제출된 검토보고서에는 “과실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의 범죄행위를 고의범의 경우보다 가중처벌하게 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되므로 책임주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에 반하게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같은 달 동일한 취지로 신용현 국민의당 의원과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 세 건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4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주취감형(술을 먹으면 형벌 감형)' 폐지를 건의(청원)합니다’ 화면 갈무리.
지난달 4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주취감형(술을 먹으면 형벌 감형)' 폐지를 건의(청원)합니다’ 화면 갈무리.
서 의원실 관계자는 “‘외국 사례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입법조사처를 통해서 자료를 받아본 바로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09년 발행한 보고서 ‘아동 성범죄 근절 위한 종합 정책 제언’에 따르면 “프랑스와 영국 같은 경우에는 마약이나 음주 후에 성폭력을 하는 경우에는 가중사유로 규정”하고 있으며 “현행 양형기준은 법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규율 또는 배치되어 있어서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4일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3인도 음주를 심신장애 범주에서 제외토록 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출했다. 신 의원은 “음주운전의 경우 운전만 해도 무겁게 처벌하면서, 성폭행 등 피해자가 있는 범죄의 경우 음주가 형의 감경사유가 되고 있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며 “음주로 인한 범죄는 자의로 심신미약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감경해야할 이유가 없으므로 제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주취감경 조항 폐지는 지난달 4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주취감형(술을 먹으면 형벌 감형) 폐지를 건의(청원)합니다’가 올라오면서 화제가 됐다. 해당 청원은 21만6774명이 서명하면서 마무리됐다. 청와대는 지난 8월 국민청원 게시판을 개설하며 20만명이 넘은 청원에 대해서는 30일 이내에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관계자가 공식 답변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