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태국 여성 추티마씨(29)는 11년이 지난 2017년 11월14일 싸늘한 주검으로 고국에 돌아갔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입국한 아버지는 ‘10년 넘게 한국에서 고생한 딸의 장례만큼은 태국식으로 치뤄주고 싶다’며 시신을 거둬갔고 지난 15일 가족들의 오열 속에 장례가 치뤄졌다.

8일 후인 23일 오전, 추티마씨 사건을 지원하는 이주노동자 및 여성 인권운동 단체, 법률가 단체 등은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추모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이주여성을 포괄하는 이주여성 폭력피해지원체계를 마련하라”며 “단속추방을 중단하고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전면 합법화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으면 추티마씨가 겪은 사고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주장했다.

▲ 추티마씨 사망 사건을 지원하는 이주노동자 및 여성 인권운동 단체, 법률가 단체 등은 23일 오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추모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추티마씨 사망 사건을 지원하는 이주노동자 및 여성 인권운동 단체, 법률가 단체 등은 23일 오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추모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추티마씨는 지난 1일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50대 남성 동료 김아무개씨에게 살해당했다. 친형의 종용으로 자수한 김씨는 성폭행을 시도하다 추티마씨가 저항하자 살해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추티마씨의 지인들에 따르면 당일 김씨는 ‘출입국관리소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단속이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다’며 추티마씨를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데려갔다.

추티마씨는 2006년 ‘관광 비자’로 입국해 11년 간 경기도 안성 인근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에서 일한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규정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대부분 단속 즉시 구금돼 본국으로 추방된다.

살해된 지 4일이 지난 11월5일 추티마씨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돌 등으로 심하게 가격당해 숨진채 경상북도 영양의 한 야산에서 발견됐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이 사건이 미등록 이주 노동자에 대한 단속추방 중심의 정책과 이주 여성 보호 시스템이 마련돼있지 않은 구조 속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베트남에서 온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활동가 한가은씨는 기자회견에서 “단속되는 즉시 추방되니 미등록 이주민들은 경찰, 출입국관리소 단속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주변의 부당한 위협에도 신고하기가 힘들다. 미등록 이주민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출입국관리법은 ‘불법체류자’의 자진 출국을 유도하기 위한 출국 권고와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한씨는 이 규정처럼 자진 출국 기한을 넘겨 체류하면 추방한다거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체류 자격을 제공할 기회를 주는 방향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석원정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 위한 모임 소장은 “그 무엇보다 체류 자격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주장했다. 그는 “추티마씨는 범죄자가 아니다. 10년 동안 한국에서 일을 하며 한국 경제에 기여했고 한국 물품을 사용하며 살았다”며 “새 정부는 적어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범죄자가 아닌 한국 사회에 기여한 노동자라는 걸 인정해달라”고 말했다.

우다야 라이 서울·경기·인천 이주노조 위원장은 “새로 발표된 외국인 노동자 정책 기본계획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줄여야 한다고 정한다. 우리(한국 정부) 필요만큼만 있게 하겠단 것”이라며 “정부 스스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 그렇게 필요하다면 이들을 합법화하는게 맞다”고 주장했다.

▲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준비한 고 추티마씨 영정사진. 사진=손가영 기자
▲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준비한 고 추티마씨 영정사진. 사진=손가영 기자

이주 여성 현실에 초점을 맞춘 여성폭력 보호 지원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 결과 응답자의 4.3%가 성폭행, 성희롱 등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등답했다. 2010년 경남이주민센터가 이주 여성 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3%인 5명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27.8%에 달하는 15명은 응답하지 않았다.

2012년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가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1057명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 이주노동자 10명 중 1명 꼴인 10.7%가 성폭행, 성희롱 등 피해를 경험했다.이 중 35.5%가 강간 피해를 경험했다. 응답자의 89.9%가 사장이 가해자였다고 답했다.

고진달래 반성매매인권행동 활동가는 회견에서 “이 사건은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 사례다. 이주민 수용 정책을 개선하는 것 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여성을 소유물, 쾌락을 주는 대상으로 보고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남성 중심의 인식이 근저에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고 활동가는 “이주 여성 폭력의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처벌하는데 신분이 미등록인지 구분은 무의미하다”며 “사업장 내 성폭력 교육 강화하고 문제 발생 시 회사에 책임을 지우는 강력한 조치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사건을 지원하는 김진 변호사는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에 대한 보호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주노동자는 강력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범죄피해자 보호제도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추티마씨 유족은 ‘범죄피해보상금 제도’가 규정하는 보상금 신청을 법무부에 문의했다. 법무부는 ‘불법체류자의 경우 규정과 사례가 없어 가능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김 변호사는 “가해자에게 유족이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고 사건 지원 변호인으로서 형사 절차에 참여해 유족 억울함을 호소하고 향후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라 밝혔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스님 세 명이 기자회견 시작 전 추티마씨를 추모하는 극락왕생 기도문을 읊었다. 기도 후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광장에 설치한 추티마씨 영정사진 앞에 국화꽃을 올리고 차례로 묵념 인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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