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이 기업체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부당노동행위에 관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정의당 비상구’를 통해 진행된 노동 상담 사례를 정윤영 르포 작가(‘숨은 노동 찾기’ 공저자)가 당사자 인터뷰 등을 통해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 뜨거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갑질’은 물론 임금체불 등 불법·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 편집자주


파리바게뜨 제빵 기사 정혜미씨. 그녀는 대학에서 식품영양학과를 공부하고 졸업 뒤 제과점 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유명제과점이었지만 휴무도 적고 월급도 너무 적었다. 1년 반 경력을 쌓은 뒤 2007년 파리바게뜨에 입사했다. 파리바게뜨에서 받은 첫 월급은 200만원 남짓. 적지 않은 월급이었고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매장 아르바이트에서 시작한 임종린씨는 같은 매장 제빵 기사 추천으로 일을 시작했다. 다른 기사들처럼 제빵에 대한 열정이나 파티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빵이 적성에 잘 맞았다. 파리바게뜨 기사로 대단한 성공은 없겠지만, 그 날 구운 빵이 마음에 들고 맛있으면 그게 보람이라던 선배의 조언 때문인지 예쁘게 나온 빵을 보면 일에 애착이 느껴졌다.

파리바게뜨에서 일하지만 파리바게뜨 직원은 아니다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설렘과 초봉 200만 원이라는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7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할 때까지 1분도 못 쉴 때가 허다할 만큼 바쁘고 힘들었다. 매장에 가장 먼저 출근해 오전 내내 빵을 굽는데, 수십 개 종류의 빵을 몇 백 개씩 만들고 다음 날 판매할 빵을 준비하다보면 점심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점심을 굶더라도 빨리 케이크를 만드는 건 매장 점주의 닦달도 닦달이지만, 야근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밥 먹을 시간은커녕 화장실 자주 갈까봐 물도 마시지 않는다며 노동 환경들을 나열하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일하는 곳이 이렇게 어처구니없다는 사실에 민망한 듯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생리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화장실을 못 가니까 너무 찝찝하죠. 별 수 없어요. 그냥 버티는 거예요. 그리고 덥고 추운 거요. 겨울엔 매장이 정말 추워서 손이 안 움직여요. 동상에 걸려서 휴직하는 기사들도 있어요. 그냥 야외에서 유니폼 하나 입고 일하는 느낌이에요. 여름엔 오븐 열기 때문에 40도가 넘어요. 정말 정신이 혼미해지거든요. 그런데 에어콘도 못 틀어요. 전기세 때문에”

야외나 다름없는 주방이 제빵 기사들에겐 유일한 공간이다. 쉴 시간도 없거니와 휴게 공간도 없다. 매장에 앉았다가 점주에게 매출 떨어진다고 욕 먹은 기사들 얘기가 떠올라 매장에 앉는 건 꿈도 안 꾼다. 휴게 공간이 없으니 유니폼을 갈아입는 것도 곤욕이다. 주방 문 사이에 몸을 숨기고 옷을 갈아입는데, 그런다고 주방 안에 있는 cctv를 피할 수는 없다. 점주가 cctv를 확인하고, 일부러 문을 열고 들어와 문제가 됐던 사건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처지지만, 별 다른 도리가 없다. ‘그냥 다른 매장도 다 이러니까 원래 이런 건가’ 익숙해질 뿐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제빵 기사들이 가장 힘들게 생각하는 건 한 달에 여섯 번 휴무가 휴무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사들이 쉬는 날엔 지원기사들이 대체근무를 나오는데, 지원기사 한 명과 4개 매장 기사들이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휴무일 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매장 기사는 지원기사가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야하기 때문에 원하는 날 쉴 수 없고 원하지 않아도 쉬어야 할 때가 많다. 휴무일이 이유 없이 갑자기 바뀌는 날도 많아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지원기사라고 고충이 없지 않다. 휴무일을 맞추느라 갈등도 많고, ‘땜빵 기사’를 보는 점주들의 차가운 눈초리도 늘 스트레스다.

저녁이 있는 삶, 휴식이 있는 삶은 파리바게뜨 제빵 기사들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 끝나면 본사에서 실시하는 교육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늦게 집에 들어오면 허겁지겁 폭식하고 잠들었다. 쉬는 날엔 자기 바쁘고 그나마도 회사에서 부르면 나가야 한다.

파리바게뜨 초봉만 보고 입사했다가 얼마 못 가 그만두는 기사들이 많다. 상상보다 일이 힘들고, 거의 매일 연장인데도 수당은 없다. 높다고 생각했던 초봉 200만원은 절대 높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10년을 일해도 월급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기사 한 명이 일을 그만두면, 당장 그 자리를 메워야하는 건 지원기사들이다. 혜미씨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래 할 직업이 아닌 것 같다고 못 박았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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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급은 최저임금이 안 돼요. 이상한 수당을 많이 만들어놓고 기본급에 포함하면 최저임금이 된다고 설명하는 식이에요. 10년 전에 200만원 받으면 높은 편이었는데 일한 만큼의 대가는 전혀 아니에요. 그런데 10년을 일해도 신입기사랑 별로 차이가 안 나요. 오래 버티는 게 바보 같아요.”

월급은 그대로지만, 연차가 높아지면 본사 전환 시험을 볼 수 있었고, 그게 기사들에겐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목표였다. 그마저도 지금은 제빵경진대회에서 1등을 하고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를 받는 한 명만 본사전환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연차 높은 기사들의 불만이 많아지자, 본사는 16년부터 핵심인재교육을 실시했다. 1년에 세 번 교육을 받고 성과가 좋으면 진급 1순위 혜택을 준다는 내용이었지만, 이 역시 희망고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기사들은 혹시나 모를 희망에 ‘목숨 걸고 교육받고 피터지게 경쟁’했다. 핵심인재교육을 받고 간혹 BMC로 진급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BMC는 협력사 관리자로 본사 전환은 아니었다.

게다가 BMC로 진급한 기사들은 거의 남성이다. 제빵기사 대부분이 여성임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다. 진급 기준을 물어보면 답은 뻔했다. ‘같은 조건이면 남자를 뽑는다, 내 마음이다.’

빵 안 팔리면 정신교육 받았다.

파리바게뜨 제빵 기사들은 입사할 때 SPC(파리바게뜨, 던킨 도너츠 등의 계열사를 갖고 있는 식품전문기업)가 아니라 협력업체와 근로계약을 맺는다. 종린씨와 혜미씨 모두 협력업체인 H사 소속이지만, 점포배치부터 기사관리, 세세한 업무 지시까지 모든 것을 본사 소속의 QSV(품질관리사)가 관리했다. 협력업체와 계약했지만 파리바게뜨 로고가 적힌 유니폼을 볼 때마다 ‘어느 정도는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도 협력사 직원이라고 소개할 때마다 ‘아~ 용역이네’하는 말을 들으면 왠지 주눅이 들고 ‘하찮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몇 년 전 협력사 관리자가 생겼는데, 그렇다고 본사 QSV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바일 메신저를 통한 업무지시와 간섭이 심해졌다. 그 시기는 파리바게뜨 오픈 매장수가 줄어드는 시기와 일치했고, 이후 본사는 품질관리를 이유로 제빵 기사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매출이 떨어지면 기사들이 만든 빵 품질이 나쁘기 때문이라며 교육을 들으라는 식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의 본사 교육은 수도 없었다. 퇴근 후, 밥도 굶어가며 몇 시간씩 조리대 앞에 서서 받는 야간 교육은 늘 피곤하지만, 가장 힘든 건 품질평가에서 점수 미달됐다는 이유로 받아야하는 ‘정신교육’이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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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본사 정신교육은 반성문을 쓰고 앞으로 빵 잘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 말고는 딱히 교육이랄 것도 없었고,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더 맛있는 빵을 만드는 기사도 없었다. ‘정신교육’에 기사들이 반발하자 버젓이 ‘부진자 교육’이라고 이름만 바꾸었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기사들을 ‘어린애 취급하고 심부름꾼 취급’하는 건 평소 QSV의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쁜 기사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고 메신저를 보낸다. 신제품을 몇 개나 만들었는지 사진 찍어 보내라, 매장에 홍보물을 붙여라, 떼라, 자잘한 것까지 요구하고, 점주들이 신제품을 주문하도록 설득하라고 영업을 요구하기도 한다. QSV가 신제품 주문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건 신제품 주문량에 따라 인센티브가 붙기 때문인데, 정작 빵을 만드는 기사들에겐 인센티브가 없다.

일한 지 10년, 교육 지원기사 조장까지 맡고 있는 종린씨는 이제껏 상여금이 있는지도 몰랐다. 우연히 상여금을 받고 있는 직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에 따지듯 묻자, 협력사는 본사 핑계를 대고, 본사는 협력사에 책임을 떠넘겼다. 답은 듣지도 못하고 종린씨는 조장자리만 빼앗겼다.

조장 수당 7만원이 깎인 건 퇴직금을 못 받은 타 지역 기사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수준이었다. 소속 협력사가 바뀌면서 퇴직금을 너무 적게 받은 기사들이 어떻게 된 거냐며 설명을 요구하자, 협력사는 ‘퇴직금이 너무 많아서 보이스 피싱 위험이 있어서 안 줬다’고 답했다. 혜미씨는 본사나 협력사나 늘 이런 식이라며 언성을 높였다.

“항상 무시하고, 몰라도 되니까 하라면 하라는 식인 거죠. 기사들을 성인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애들 다루듯 해요. QSV들은 기사를 없는 인간으로 대하는 것 같아요. 진짜 소모품처럼 대하는 거죠. 어차피 일 관두면 그만인 애들이라고 대놓고 얘기해요. 그런데 기사들은 아파도 나와서 일하거든요. 우리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제가 죽으면 오실 건가요?’

제빵 기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건 매장 점주들도 매한가지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매장에서 밥 먹는 기사 없으니까 너도 먹을 생각하지 마.’

휴식시간에 쉬려고 하면, ‘사장도 안 쉬는 데 기사가 왜 쉬어?’

몸이 아파 조리대에 기대어 있는 기사를 보곤, ‘아휴~ 아파서 어떡해. 케이크 12개 해 줘!’

품질이 별로라 팔리지 않았다며 모아둔 빵을 내밀며, ‘이건 오늘 종린이가 사가야 할 빵.’

계속되는 연장근무에 표정이 어두워지자, ‘너 한 번 더 표정 그렇게 하면 죽여 버린다.’

무슨 말만하면, ‘네가 대학도 안 나왔는데 이 정도 월급 받으면 감사히 일 해야지.’

기사들을 무시하는 점주들 갑질을 나열하는 두 사람의 하소연은 끝이 없었다. 가맹점주 갑질로 노조를 만들면 아마 전국에 있는 제빵기사들 모두 가입할 거라며 말을 이었다.

“기사들한테는 점주님이 제1고객이에요. 본사에서 실제로 그렇게 교육해요. 협력사는 점주들한테 제빵 기사 많이 써먹으라고 대놓고 얘기하고. 기사를 노예처럼 부리는 그런 악성매장에서는 기사들이 계속 갈려 나가요. 기사를 ‘하루 장사 말아먹는 애’로 생각하는 점주가 많거든요. 빵이 안 나가면 기사가 안 예쁘게 만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일은 많고 몸은 힘들다. 박봉에 휴무도 쉬는 둥 마는 둥. 본사와 협력사, 점주 사이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녹초가 되고도 늘 폭언과 모욕에 시달린다. 본사 심부름에 치이고 매장 점주에 갑질 당한 제빵 기사들이 참다 참다 협력사 관리자에 호소하면 BMC들이 하는 소리는 매 번 똑같다. ‘네가 참아. 다른 데도 똑같아.’

협력사는 점주의 요청을 전달하는 관리자라고 느껴질 뿐 기사의 얘기를 듣는 곳은 없었다. 악성 매장 점주의 막말과 모욕에 ‘제가 죽으면 오실 건가요?’ 하고 문자를 보내봤지만 대답은 항상 같다.

교육실패를 이유로 전국에서 환수해 간 금액, 240만원

그러다 문제가 된 건 말로만 듣던 ‘5만원 환수’가 현실화되면서부터였다. 교육지원기사들은 신입기사가 매장에 적응할 때 까지 교육하고, 교육생 한 명당 10만 원을 수당으로 받는다. 수당 환수는 교육을 받은 신입기사가 3개월 안에 퇴사를 하거나 점주가 기사를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교육실패’로 간주하고 5만원을 환수해 간다는 내용인데, 그런다고 듣기만 했지, 실제로 환수해 간 적은 없었다.

없는 줄 알았던 5만원 환수가 2016년 4월, 한꺼번에 시행됐다. 그 동안 교육실패로 간주된 사례를 모두 소급 적용해 그 액수를 빼고 월급을 지급한 것이다. 혜미씨는 15만원이 깎였고, 종린씨는 10만원이 깎여 나왔다. 종린씨는 참을 수 없이 화나고 억울했다. 교육실패로 간주된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악성매장의 갑질을 못 견디고 매장을 옮긴 경우였다. 교육실패라고 보기엔 교육지원기사의 과오가 아니었다. 돈을 환수해 간다는 공지도 없었고, 본사에 사실 확인을 요청해도 아무 답이 없었다. 10년 동안 착실하게 일 해온 게 ‘호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 퇴사를 결정했다.

퇴사를 결정했지만 혜미씨는 10년 세월이 억울했다. 지금 그만두면 자신이 ‘그냥 없어져버리는 것’ 같아 뭐라도 하고 싶었다. 혜미씨는 본사 게시판에 5만원 환수가 기사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일인지 글을 써 올렸다. 게시판에 올린 글이 하루 만에 삭제되자, 혜미씨는 질세라 다시 글을 올렸다. 개인 감정을 호소하지 말라는 관리자 댓글을 보고 10년 간 참았던 분노가 한 번에 터졌다. 두 사람은 이 5만원을 어떻게든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비상구를 찾아간 계기를 설명했다.

“노동부에서도 시큰둥하더라고요. 연장 수당도 없고 연장 시간을 맘대로 고친다니까 본사랑 얘기하래요. 협력업체 직원인데 본사가 업무 지시하는 거 불법 아니냐고 했더니 그건 협력업체랑 얘기하래요. 노동부에서도 노동자를 안 도와주는 거예요. 그 때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일하는 친구가 이런 게 있다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그게 정의당 비상구 현수막이었어요. 비상구에 연락해 보라고, 여기는 공짜라면서(웃음).”

비상구 만나 노조 설립까지, 두려움에서 통쾌함으로

비상구(비정규노동상담창구) 문을 두드리고 최미숙 노무사를 만날 때만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났지만 노무사는 무슨 얘기든 상황을 이해해주고, 두 사람 속마음까지 헤아려주었다. 문제의 5만원부터 10년 동안 쌓인 불만을 맘껏 털어놓았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노무사는 미지급된 연장수당도 받을 수 있다며 자료들을 모아두라고 당부했지만, ‘어차피 그만 둘 거 자료는 무슨 자료, 얘기했으니까 됐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우리 얘기를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 화나고 억울한 마음이 가라앉았고, 이걸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상담 이후 비상구에서 끊임없이 전화를 해댔고, ‘자료준비해라, 연장수당 받아야 된다, 기자회견하자’ 요구하는 게 많았다. 이정미 의원을 만나러 국회에 가는 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혹시 본사에서 알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손해배상, 명예훼손 같은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옥 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주변 사람의 말도 불안했지만, ‘지금은 전혀 후회 없다’고 얘기하는 두 사람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했다.

“처음엔 신고한 걸 숨기려했는데, 막상 알려지고 나니까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하더라고요. 우리가 옳은 일 하니까 본사에서도 못 건드리는구나 싶었죠. 비상구 만나고 나서 업무 지시하는 카톡방이 사라지는 걸 보니까 통쾌한 거예요. 얼마 뒤엔 노무사님이 휴가비가 이상하다고 연락을 하셨어요. 휴가비가 왜 적게 나왔냐고 협력사에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노무사님한테 바로 일렀어요.(웃음) 그랬더니 30분 만에 휴가비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뭉치니까 통쾌하다 싶었고 그 때부터 신났죠.”

두 사람이 처음부터 노동조합을 생각하고 비상구를 찾아간 건 아니었다. 계획에 없던 조합 설립을 서두른 건 한국노총 소속의 본사 노조가 제빵 기사 가입을 받겠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두 사람이 사무장과 지회장을 맡기로 하고 민주노총 화섬노조에 가입했다. 아쉬운 대로 본사 전환 설명회가 끝난 자리에서 노조가입원서를 처음 돌렸다. 몇 명이나 가입할까 싶었지만 서너 명을 빼고 모두 가입하는 걸 보고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40여 명에서 시작한 조합원은 몇 달 지나지 않아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 노조를 만들고 파리바게뜨 본사 앞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한 가운데가 임종린 지회장. 사진=정의당 비상구 제공
▲ 노조를 만들고 파리바게뜨 본사 앞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한 가운데가 임종린 지회장. 사진=정의당 비상구 제공


비상구를 만나면서 시작된 통쾌함은 노조 가입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 본사의 업무지시가 없어지고 지긋지긋하던 야간 교육도 사라져,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하는 게 편해졌다. 본사나 협력사뿐 아니라 점주들도 기사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기사들의 불만과 요구를 전처럼 뭉개지도 않는다. 빵 굽는 기계 취급하던 관리자들이 기사들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동료 기사들끼리 힘든 걸 털어놓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도 기분 좋았다.

지금 여기에서 희망하는 법, 투쟁하면서 처음 배웠다.

노조를 만들고 파리바게뜨 제빵 기사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런데서 어떻게 참고 일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대답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교육지원기사로 일하는 동안 자신 역시 참고 일하는 분위기를 후배들에게 전달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럴 때마다 만약 노동법이 뭔지 알았더라면, 노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노조가 생겼다고 모든 게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다. 본사는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아예 거부하고 있다. 직접 고용하라는 노동부 명령에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직접고용 시정명령 처분을 취소하고 집행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소송을 냈다. 그러고는 협력사, 가맹점과 발 빠르게 합작회사를 만들어 ‘상생기업 설명회’ 열었다. 설명회라고 하지만 직접고용 포기각서와 다름없는 확인서를 받는 자리였다.

비상구 상담부터 노조설립까지 일사천리로 달려왔지만, 본사의 반응을 보면 갈 길이 멀다는 생각부터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본사의 허위사실 유포와 확인서 서명 요구에 조합원을 모으는 게 쉽지 않다. 노조 만든다고 바뀌겠냐는 무기력한 반응에 힘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좌절보다는 희망이 더 컸다. 희망까지 아직은 먼 그 거리를 조합원들이 채워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기사들 바람대로 한 달에 여덟 번 쉬고, 동료들한테 미안해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휴가를 즐기며, 악성 점주 갑질에 치이지 않으면서 그 날, 그 날 만든 맛있는 빵에 보람을 느끼며 일하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두 사람은 생각한다. 그 근거는 이미 충분했다. 비상구를 찾은 4월부터 지금까지 그 희망의 근거를, 현실이 될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노조를 만들고 두 사람의 삶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는 말에 혜미씨는 ‘투쟁’이라는 단어를 처음 말해본다고 답했다. 얼마 전까진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투쟁을 외치며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왜 저러지?’했던 기억에, 아직 ‘투쟁’이란 단어가 낯설고 입 밖에 꺼내는 게 자신 없었다. 그러면서도 선배 조합원들의 우렁찬 투쟁 소리를 들으면 ‘멋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우리도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내가 나가면 그만이지’ 했던 것이 이제는 ‘부당한 건 얘기하고 필요한 건 요구할 수 있다’고 전과 달리 생각할 때마다, 또 우리가 바꿀 수 있다고 희망을 얘기할 때마다 심상정 의원이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는 얘기로 종린씨는 답을 대신했다. ‘노조 만들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는데 이게 진짜 세상’이라던 말. 처음 비상구에서 상담을 하고 여기까지 온 게 얼떨떨하지만, 제빵 기사 얘기를 들은 사람들의 응원과 당당하라는 가족의 격려, 옆에 다시 없을 동지를 생각하면 ‘이게 진짜 세상’이라던 말이 마음에 새겨지는 듯 선명해졌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 달라는 주문하자 두 사람은 요새 그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한 말씀 해달라’는 말에 머리가 텅 비는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로 받아쳤다. 그러면서도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며 동료 기사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노조가 시끄럽게 하는 게 아니고 이제야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본사는 이건 방향이 잘못된 거라고 말하는데, 그동안 대화하자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그게 안 돼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이게 최후의 수단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회사가 원하는 대로 평생 참으면서 살아야 돼요. 숨지 말고, 참지 말고 우리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저자 : 정윤영

낮엔 요가, 밤엔 과외로 밥벌이하며 르포를 쓴다. 월간 좌파에 노동르포를 연재하고 있고, ‘숨은 노동 찾기’와 ‘416 단원고 약전’을 함께 썼다. 이 모진 삶에도 희망은 있다는 생각에 뭐라도 하고 싶어 펜을 들었다. 언젠가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꿈꾸며, 일터와 삶터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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