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걸 오늘 처음 봤습니다.”

안경을 쓰고 파란 외투를 입은 피고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고형곤 검사와 최씨의 변호인 이경재 변호사는 신경전을 벌였다. 김세윤 재판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9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재판정 풍경이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는 오전 10시에 열린 최씨의 직권남용 혐의 등에 대한 공판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증거물인 태블릿PC를 10여 분 간 검증했다. 지난해 10월 JTBC가 입수하고 검찰에 임의 제출한 태블릿PC가 공개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방청석은 기자들을 빼면 제법 한산했다. 일부 친박 단체의 주장과 달리, 태블릿PC의 진위여부는 결론이 난 셈이기 때문이다.

태블릿PC 검증은 검찰 측의 요청으로 전원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외양만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당초 법정에서 전원을 켜고 파일을 열람하려고 했으나, 전원을 켜면 파일의 고유한 값인 해시 값이 변경된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앞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감정할 자료와 검찰이 이미 저장해놓은 자료의 해시값이 서로 다를 경우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검찰과 최씨 양측은 전원을 켜지 않고도 이미징(Imaging·데이터를 파일 형태로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국과수에 태블릿 PC의 감정을 의뢰하기로 합의했다.

최씨 변호인 이경재 변호사는 “지난 10월 JTBC로부터 임의 제출을 받은 후 몇 단계에 걸쳐 전원을 켠 사실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고형곤 검사는 “지난해 증거물로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이미징한 이후 켠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자 최씨가 옆에서 “제가 조사받을 때 켰다고 들었습니다”라고 거들었다.

오전 10시 20분. 압수물 봉인지에 담긴 하얀 태블릿PC가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델 번호인 ‘SHV-E140S’와 제작 날짜와 품번으로 보이는 ‘20120322 0024936’라는 숫자, 시리얼 넘버가 법정에 설치된 스크린 속에 선명하게 보였다. 뒷면이 긁힌 자국도 눈에 띄었다. 최씨와 변호인단, 그리고 최씨 측과 동행한 전문가라는 검증 참여인 남성 두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 중앙 책상 앞으로 모였다. 최씨도 손을 앞으로 모으고 태블릿 PC를 살펴봤다. 최씨 측 감정 전문가들은 재판부의 허락을 얻어 태블릿PC 외관 사진을 여러 장 찍기도 했다. 서로 작게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법정 앞쪽에서 들려왔다.

자리로 돌아온 최씨는 태블릿PC를 처음 봤다고 주장했다. 그는 “처음 검찰 조사를 받을 때부터 증거 원칙에 의해 내 것인지 확인시켜 달라고 했는데 보여주지 않았다”며 “JTBC도 입수 경위에 대해 말이 계속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고영태의 계획에 검사님들도 일부 가담했거나, JTBC가 기획된 국정농단을 한 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1년 동안 보여 달라고 요구해왔던 것입니다. 저는 이걸 오늘 처음 봤습니다.” 최씨는 마지막 발언에서 ‘태블릿PC 조작설’을 반복 제기했다. 최씨는 ‘태블릿PC 조작설’의 ‘창조자’다. 최씨는 지난해 10월27일 K스포츠재단 부장이었던 노승일 씨와 통화에서 “걔네들(JTBC)이 이게 완전 조작품이고 얘네들이 이거를 저기 훔쳐가지고 이렇게 했다는 것을 몰아야 되고…”라며 사건 은폐 지시를 내렸다.

▲ 지난 1월 16일, 최서원씨가 헌법재판소에 증인신문을 위해 출석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지난 1월 16일, 최서원씨가 헌법재판소에 증인신문을 위해 출석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날 검찰과 변호인측은 끝까지 신경전을 벌였다. 고 검사는 “우리가 증거물을 숨긴 것처럼 얘기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빠르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묻어났다. “태블릿PC 내의 자료들이 피고인 동선과 일치한 점, 정호성 피고인의 진술을 통해서 최서원이 PC를 사용했다고 증거로 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변호인께서 의혹 제기하고 외부에서도 조작 주장하고 있는데 저희로서도 이번 감정을 통해 태블릿PC를 검찰에서 조작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최서원씨가 썼다는 점 분명히 확인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이 변호사가 반론하려 하자 재판장은 “자, 변호인...”이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변호사가 지속적으로 검찰 측 발언을 물고 늘어지자 곤란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변호사는 “증거를 제시하는 게 검사의 의무 아닌가요?”라며 말을 끝맺었다. 오전 10시 40분경 공판이 마무리됐다. 참관인석 맨 앞에 앉아있던 시민 6명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오늘 최씨 측 검증 참여인으로 참석하려던 변희재 전 미디어워치 대표도 함께 퇴장했다. 재판부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가 나오는 대로 공판 기일을 잡겠다”고 밝혔다.

공판이 끝난 후 서울중앙지법을 빠져나온 변희재 전 대표는 친박 성향의 유튜브채널 ‘SNS TV’와 인터뷰에서 “검찰이 태블릿PC를 이미 켰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이미 증거 인정이 안 된다”며 열을 올린 뒤 “뒷면이 많이 낡았던데, 개인이 쓴 게 아니고 업무용으로 여러 명이 막 갖다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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