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방송 SBS의 ‘사장 임명동의제’ 도입이 언론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SBS는 10월13일 방송사 최초로 ‘사장’을 비롯한 방송 편성·시사교양·보도 부문 최고 책임자에 대한 임명동의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SBS 사장은 SBS 재적 인원의 60% 이상이 반대하면 임명할 수 없다.

한국기자협회 편집위원회는 이를 KBS, MBC와 비교하며 “민영방송 사주도 내부 구성원의 요구에 화답하는 상황에서 고대영, 김장겸과 공영방송 이사진은 장기파업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며 “참담하다”고 비판했다. SBS의 대주주는 태영건설이다.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10월23일 노보에서 “언론계가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언론의 공정성을 높이는 또 다른 방안을 제시한 셈”이라며 “언론 종사자들의 견제 장치가 더해진다면 더욱 공정성이 보장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 노조는 “우리도 할 수 있다”며 편집국장 신임투표제를 제안했다. 편집국장 신임투표제가 국장만이 아니라 국장을 지망하는 부장, 차장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폭언, 성희롱 등 수직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박정훈 SBS 사장(왼쪽)과 윤창현 언론노조 SBS본부장이 10월13일 사장 임명동의제를 합의했다. 사진=SBS 제공
▲ 박정훈 SBS 사장(왼쪽)과 윤창현 언론노조 SBS본부장이 10월13일 사장 임명동의제를 합의했다. 사진=SBS 제공

조선일보는 이제 막 걸음을 뗀 수준이지만 이미 최소한의 견제 장치로 편집국장 혹은 보도국장 임명동의제, 중간평가제, 임면동의제를 시행하는 언론사가 적지 않다. 임면동의제는 임명과 해임 모두 구성원 동의를 받아야하는 제도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 같은 견제 장치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 바람이 언론계에 불면서 편집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만 해도 “편집권의 본래적 소유자는 신문의 자본주이고 편집권의 실제적 행사자는 경영관리인 및 그 위임을 받은 편집 관리인(대체로 주필, 편집국장)”으로 여겨졌다.

한국기자협회는 1988년 6월 “편집권은 자본가나 권력 계층이나 지식인 계층이, 언론 영역의 자율적 행위 규범에 충실한 언론 전문인의 것, 특정 직책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 기자 전체에 의한 민주적 합의 과정으로 규정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아일보는 1989년 ‘편집·출판국장 선임에 관한 신임 투표’를 도입하고 2002년 한차례 부칙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회사에서 국장을 선임하면 공포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해당 국의 재적 인원 5분의 1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신임투표를 발의할 수 있다. 신임투표가 발의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중앙일보도 1989년 임명동의제를 도입했고 한겨레는 1988년 창간과 동시에 대표이사와 편집국장 직선제를 도입했다. 현재는 대표이사만 직선제로 뽑고 있다. 방송사 중에는 CBS가 노조 설립 초창기인 1989년에 ‘공정방송을 위한 편집국장 보도국장 임명 조합원 여론조사’를 실시해 사측에 전달했다.

▲ 1989년 편집국장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는 연합뉴스 기자들. 사진=연합뉴스지부
▲ 1989년 편집국장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는 연합뉴스 기자들. 사진=연합뉴스지부

물론 20년을 거치면서 부침도 많았다. 가령 중앙일보의 경우 1997년 임명동의제 대신 중간평가제를 도입했다가 1998년 다시 임명동의제로 개정, 2000년 중간평가제 재도입 등의 과정을 거쳐 한동안 중간평가제를 시행하다가 현재는 ‘편집국장 불신임 건의’를 단체협약에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편집국장이 신문 제작 공정성을 잃고 회사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을 때 노조는 대표이사에게 편집국장에 대한 불신임을 건의할 수 있다. 대표이사는 건의를 받은 날로부터 2주 이내 편집국장 교체를 비롯한 적절한 인사 조치 내용을 노조에 통보해야 한다.

중앙일보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2006년 편집국장 중간투표가 간신히 통과가 됐다. 거의 불신임될 뻔 했다”며 “이후 사측에서 무조건 편집국장 중간투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자의 인사권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했고 대신에 임금을 많이 올려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솔직한 말로 노조위원장도 임기 끝나면 다시 평기자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불신임 건의를 할 수 있겠나”라며 “중간평가제가 사라진 이후에 사실상 견제장치가 없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임명동의제를 도입했지만 20년 동안 서서히 ‘퇴보’한 사례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 디자인=이우림 기자

임명동의제보다 더 ‘민주적’인 직선제는 모든 언론사에서 사라졌다. 언론사 최초로 대표이사와 편집국장 직선제를 도입했던 한겨레는 2005년 편집국장은 임명동의제로 전환했다. 대신 임명동의제를 보완할 수 있는 ‘중간평가 의무화’와 ‘해임투표 조항’을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2003년 임명동의제로 전환했고 2000년 직선제를 도입한 서울신문은 2009년 직선제를 폐지했다. 2009년 당시 전국단위 종합일간지를 기준으로 편집국장 직선제를 실시하는 곳은 서울신문이 유일했다. 현재 서울신문은 ‘지명선출제’를 시행하고 있다.

직선제 폐지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는 ‘사내 정치’가 꼽힌다. 2009년 당시 서울신문 노동조합은 노보에서 “직선제가 서울신문에 많은 상처를 남긴 건 사실”이라며 “개인의 실력보다는 조직의 힘으로 편집국장에 당선되는 일이 생기면서 회사가 사내 정치의 전쟁터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현재 대표이사를 직선제로 뽑고 있는 한겨레 역시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한겨레 노조 관계자는 ‘인기 영합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일견 타당한 지적”이라며 “선거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이 남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1995년 CBS 노보. 사진=CBS 지부
▲ 1995년 CBS 노보. 사진=CBS 지부

그럼에도 이 같은 견제장치는 각사 사정에 맞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울신문은 직선제를 없앤 이후 임명동의제를 거쳐 현재는 지명선출제다. 대표이사가 2명의 편집국장 후보를 지명해 발표하면, 투표를 통해 선출 절차를 진행한다. 유권자 재적 과반수 투표가 안 될 경우 대표이사는 또다시 후보 2인을 지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서울신문 노조는 “지명선출제가 과거 임명동의제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사장이 후보를 먼저 임명하는 하향식 선출방식이 유지됐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며 “그럼에도 지면에는 관심 없이 사장에게만 잘 보이는 후보만큼은 편집국이 투표를 통해 걸러낼 수 있다”고 평가했다.

CBS는 1995년부터 ‘추천선거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회사가 편성국장, 보도국장을 임명하기 4주 전에 노조에 통보하면 노조는 전 조합원 투표를 통해 2명을 회사에 추천한다. 회사는 노조가 추천한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을 국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더불어 이렇게 임명된 국장은 2년 임기가 보장된다.

이에 대해 이진성 CBS 노조위원장은 “임기 보장은 직원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을 사장이 함부로 못 자르게 하는 것”이라며 “부작용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종교 혹은 자본 권력으로부터 공정성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추천선거제도와 국장 임기 보장이 압도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 한겨레는 대표이사를 직선제로 선출하고 있다. 사진은 올해 2월 한겨레 대표이사에 출마한 후보들.  사진=김도연 기자
▲ 한겨레는 대표이사를 직선제로 선출하고 있다. 사진은 올해 2월 한겨레 대표이사에 출마한 후보들.
사진=김도연 기자

그리고 최근 방송 공정성 등이 화두가 되면서 다시 임명동의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가령 YTN 노사는 지난 4월28일 ‘보도국장 임면동의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YTN 사장이 새 보도국장을 내정하면 보도국 구성원들 투표를 거쳐 임명이 확정되고 보도국장을 해임할 때도 해임동의 투표를 거쳐야하는 제도다.

후보자가 임명동의 투표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사장은 3일 이내에 새로운 내정자를 지명해서 다시 임명동의 절차를 받아야 한다. 당시 YTN 구성원들은 “보도국장 임면동의제는 사장의 일방적인 임명제의 종언을 알리는 동시에 끝없이 추락을 거듭한 YTN 보도를 되살릴 수 있는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노보에 따르면 조선일보 사측은 노조의 제안에 대해 “파벌이 형성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노조는 “투표권이 생겼다고 개인적 이해에 따라 엉뚱하게 행사할 것으로 보는 것은 기자들의 수준을 무시하는 발상”이라고 맞받았다.

한겨레 노조 관계자는 “임명동의제나 임면동의제 등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나 그동안 한겨레가 해 온 결과 부작용 보다 공정성, 독립성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특히 사주나 오너십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언론사일수록 필요한 제도”라고 평가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