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를 국정 과제 추진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던 정황이 담긴 문건 일부가 11일 공개됐다.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KBS 프로그램 내용을 문제 삼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제재를 지시하고, 국정 역사 교과서와 누리과정 예산 국면에서 KBS를 활용해 대국민 홍보를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정황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KBS본부, 본부장 성재호) 파업뉴스팀은 박근혜 정부 당시 작성된 청와대 캐비닛 문건에서 KBS 관련 문건 일부를 확인했다고 11일 보도했다. 문건은 이병기 전 비서실장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지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전 실장은 2015년 2월 초 방송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뿌리 깊은 미래’를 2015년 3월23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언급했다.

이 전 실장은 “‘뿌리 깊은 미래’는 건국 가치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며 “KBS에서 어떻게 이런 다큐를 제작할 수 있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제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 연합뉴스
▲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 연합뉴스


실제 이 전 실장이 언급한 지 한 달 후 방통심의위는 해당 프로그램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문제가 있다며 KBS에 법정 제재인 ‘경고’ 조치를 내렸다.

당시 방통심의위가 지적한 문제는 크게 세 가지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남침’이라고 명확히 적지 않았다는 것 △서울 수복 후 뚜렷한 증거 없이 북한군에 부역한 혐의자를 처벌했다고 표현한 것은 역사 왜곡 △흥남부두 철수 당시 부두 폭파 영상을 보여주면서 ‘민간인들이 남아있었다’고 표현한 건 부정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파업뉴스에 따르면 이인호 KBS 이사장 역시 ‘뿌리 깊은 미래’ 1부가 방송된 직후 임시 이사회에서 “내용이 편향적이라는 항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이런 식으로 방송하면 앞으로 KBS 수신료를 어떻게 인상하겠냐’는 항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38일차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다룬 언론노조KBS본부 파업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38일차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다룬 언론노조KBS본부 파업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KBS다큐 뿌리깊은미래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당시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김형석 PD는 파업뉴스팀과의 인터뷰에서 “국제 정세, 전쟁의 기원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아니어서 남침이라는 용어를 안 썼을 뿐”이라며 “역사를 다루는 모든 프로그램에 그런 잣대가 적용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제작자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는데 방심위에선 그런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파업뉴스팀은 이 전 실장이 국정 역사 교과서 추진 과정에 KBS와 EBS 등의 매체를 활용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청와대 캐비닛 문건에서 확인했다.

2015년 9월30일 회의에서 이 전 실장은 “교과서 국정화 성공을 위해 국민을 설득하고 비판 세력을 제어해야 한다”며 “대국민 홍보 강화를 위해 KBS, EBS 등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파업뉴스팀 분석에 따르면 이후 역사 교과서 국정화 관련 KBS ‘뉴스9’은 2015년 9월 기준 2건에서 10월 기준 36건으로 급증했다.

파업뉴스팀은 “당시 KBS 뉴스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 입장을 충실히 전했을 뿐 검증 보도가 전무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교육부를 담당한 이경진 KBS 기자 역시 “교과서 내용을 분석하고 학계 및 정부 입장을 모두 담는 시리즈 5개를 준비했다”며 “방송이 나가기로 한 날 오전 편집회의 전에 개요가 빠졌고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38일차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다룬 언론노조KBS본부 파업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38일차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다룬 언론노조KBS본부 파업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국회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에 대한 의지를 밝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38일차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다룬 언론노조KBS본부 파업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38일차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다룬 언론노조KBS본부 파업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취재했던 KBS 이경진 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이 기자는 “일선 기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취재하고 발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편집권이 정말 무섭다는 걸 당시 느꼈다”고 덧붙였다.

이외에도 이 전 실장은 누리과정 예산 논란 국면이었던 지난해 1월10일 회의에서 “이번 사태는 ‘교육청 잘못’임을 적극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며 “이런 내용이 KBS 등 방송 매체에 방영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업뉴스팀은 당시 KBS 보도가 ‘속 타는 학부모’, ‘유치원 대란’이라고 표현하며, 누리과정 예산 논란의 본질 대신 현상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비판했다. 파업뉴스팀은 “이번 사태가 교육청 잘못이라는 인식을 심으라는 이병기 실장 지시가 구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전 실장 발언으로 실제 KBS 프로그램에 대한 방심위 법정 제재가 이뤄진 것이면 방송법 위반 소지가 크다. 이 전 실장이 국정 과제 추진 수단으로 KBS를 활용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 역시 방송·편성 개입을 금지한 방송법에 저촉될 수 있다.

파업뉴스팀은 “KBS 보도를 통해 정부 입장이 잘 반영되고 비판 세력을 제압하도록 한 것은 사실상 ‘청와대 보도지침’에 해당한다”며 “방송법이 규정한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훼손한 것으로 검찰의 철저한 수사가 요구된다”고 전했다. KBS 측은 파업뉴스 보도에 대해 “특별히 언급할 사항이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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