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방송법 제6조 5항)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명문화한 방송법 조항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목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는 소수자 권리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전할 수 있는 창구로서 방송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KBS에 이 조항 의미는 각별하다. 국민 수신료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무색하게 만든 사건이 2011년 8월 KBS에서 벌어진다. 60분짜리 단막극 KBS 드라마스페셜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극본 손지혜, 연출 한준서)은 2011년 8월7일 방영됐다. 여성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1호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고등학생, 30대, 50대 여성 동성애자 커플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꼬집고 동성애자들의 사랑과 화해를 보여줬다.

▲ 2011년 8월7일 방영된 60분짜리 단막극 KBS 드라마스페셜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극본 손지혜, 연출 한준서)은 여성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1호 드라마’였다. 사진=KBS
▲ 2011년 8월7일 방영된 60분짜리 단막극 KBS 드라마스페셜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극본 손지혜, 연출 한준서)은 여성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1호 드라마’였다. 사진=KBS

방영 전부터 ‘예견된 파장’이 일었다. 바른 성문화를 위한 국민연합 등의 단체를 비롯해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의 KBS 항의 방문이 계속됐다. 이들은 작가·PD는 물론 당시 김인규 KBS 사장 사퇴를 압박했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제작진을 성토하는 글이 빗발쳤다. 결국 8월10일 ‘다시보기’ 서비스는 중단됐다.

KBS 측은 “19살 이상 시청이 가능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청소년을 고려해 다시보기 서비스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고 밝혔지만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김인규 사장 시절(2009년 11월~2012년 11월) KBS 임원회의록을 보면 다시보기 서비스 중단을 명한 것은 김인규 사장이었다.

2011년 8월8일자 KBS 임원회의록을 보면 “드라마스페셜 ‘빌리시티의 딸들’ 동성애 옹호 등 부적절”이라는 지적이 KBS 심의실에서 제기됐다. 이에 길환영 KBS 콘텐츠본부장(그는 2012년 11월 KBS 사장에 임명되고 세월호 KBS 보도 통제 논란을 부른 뒤 2014년 6월 전직 대통령 박근혜로부터 해임됐다)은 “CP와 기획 단계에서 충분히 논의했다”며 “정서상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다뤄 볼만한 소재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김인규 전 KBS 사장 반응이다. 그는 “다양한 목소리 반영 측면에서는 가능하지만 그런 드라마는 MBC, SBS에 맡기고 (우리는) 다큐 등의 방식이어야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사장은 ‘627명이 항의 전화를 했다’는 보고에 “EP(제작 총괄 프로듀서), CP(책임 프로듀서)가 묵인했다면 공영방송 철학이 없다고 본다”며 “KBS가 동성애 드라마까지 한다는 건 무리다. PD도 SBS와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게이트 키핑이 안 됐다”고 질책했다.

다시보기 서비스가 중단되던 날(10일) 임원회의에서는 더 큰 질책이 이어졌다. 김 전 사장은 “드라마 스페셜이 시끄러운 것을 다시보기 서비스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 항의가 있는 게 아니냐. 담당자한테 다시보기 서비스 하지 말라고 얘기했나”라고 부하 직원들을 질책했다.  

그는 또 “그 담당자가 여기서는 누구냐”며 “담당 PD한테 삭제하자고 (이야기를) 전달했느냐. 시청자본부장이 PD협회에 연락하고 콘텐츠본부장한테 얘기해야 할 것 아니냐. 10분만 머리를 맞대면 답이 나오는데…”라고 크게 꾸짖었다.

▲ 김인규 전 KBS 사장이 2012년 7월26일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회장 자격으로 평양 방북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김인규 전 KBS 사장이 2012년 7월26일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회장 자격으로 평양 방북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김 전 사장은 당시 박갑진 KBS 시청자본부장에게 “공부 좀 하라”고 지적한 뒤 “이 (항의) 전화가 어제 6시부터 들어온 거다. 밤새 들어왔겠지만. 아침에 이러이러한 조처를 했다고 보고가 나와야지”라고 질책했다. 이에 박 본부장이 “아침에 보고 받았다”고 하자 김 전 사장은 “보고 받았으면 왜 조처를 하지 않느냐”며 고함을 치고는 박 본부장에게 보고를 다시 시켰다.

다시 박 본부장이 “시청자 상담실에 드라마스페셜 다시보기 방송 삭제 요청 전화가 47건 들어왔다”고 말하자 김 전 사장은 “(보고를) 나한테 말하지 말고 콘텐츠본부장에게 하라. 다시 (보고)해봐”라고 재차 지시했다.

그러자 박 본부장은 길환영 콘텐츠본부장에게 “시청자 상담실에 드라마스페셜 다시보기 방송 삭제 요청 전화가 47건 들어왔는데 콘텐츠본부장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동어반복했고, 길 본부장은 “문제가 있으니 뉴텍본부(뉴미디어‧테크놀로지본부)에 연락해 삭제 요청하겠다”고 대답했다.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에 발칵 뒤집어지고 “KBS가 동성애 드라마까지 한다는 건 무리”라는 공영방송사 사장 인식 수준을 드러낸 KBS 임원회의에서 방송법 제6조 5항의 의미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도리어 당시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가 ‘다시보기 서비스 즉각 재개’를 주장하며 냈던 논평이 공영방송의 책무를 제대로 설명했다.

“방송사 스스로 호모포비아를 되돌아보고 즉각 드라마 다시보기를 재개하길 강력하게 요청한다. 공영방송으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가진 시청자 의견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방송을 통해서 답하는 것이다. 정치적 외압에 맞서 공정한 방송을 만들어나갈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이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도 그렇게 해야 할 당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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