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원장 시절인 2010년 3월2일 국가정보원이 작성·보고한 MBC 장악 문건(‘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과 지난 26일부터 진행된 과거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MB 정부의 집요한 ‘PD수첩’ 탄압 시나리오다. 

MBC PD수첩 광우병 보도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확산됐고 이로 인해 취임 첫 해가 지나기도 전에 지지율이 한자리수로 급전직하했던 2008년 촛불 정국은 MB 정부의 ‘트라우마’였다. 

지난 26일 국정원 블랙리스트 사건 참고인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최승호 MBC 해직PD(2012년 해직·현 뉴스타파 앵커)에 따르면, 최 PD가 PD수첩에서 쫓겨나던 시점(2011년 3월) 이전인 2010년 11월 무렵 MB 정부 국정원은 ‘최승호 PD 전출’ 계획을 담은 ‘VIP 일일보고’를 작성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의 최 PD 전출 계획이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 

▲ 최승호 MBC 해직PD는 지난 26일 국정원 블랙리스트 사건 참고인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최승호 MBC 해직PD는 지난 26일 국정원 블랙리스트 사건 참고인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최 PD 전출은 문건 작성 4달 뒤인 2011년 3월 이뤄졌다. 김재철 전 MBC 사장과 고등학교·대학교 동문인 윤길용 MBC 시사교양국장은 취임 직후 김태현 PD수첩 CP, 홍상운 PD수첩 MC, 최승호·박건식·전성관·오행운 PD수첩 PD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김재철 전 MBC 사장이 2011년 2월 연임한 직후 이뤄진 ‘물갈이 인사’였다.

즉, 사장 권력이 가장 막강할 때 PD수첩 탄압이 본격화했다. 이 역시 “대외적 상징성 때문에 당장 폐지가 어려운 PD수첩의 경우 사전 심의 확행 및 편파 방송 책임자 문책으로 공정성 확보”(2010년 3월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 中)에 상응하는 수순으로 풀이된다.

대대적 PD수첩 PD 교체는 ‘김재철(사장/현 자유한국당 정치인)-백종문(편성제작본부장/현 MBC 부사장)-윤길용(시사교양국장/현 MBC NET 사장)-김철진(PD수첩 팀장/현 원주 MBC 사장)’으로 이어지는 탄압의 주체가 수면 위로 드러난 계기였다.

최 PD에 따르면, 2012년 1월15일 국정원 국익 정보국이 만든 ‘부서 핵심 성과 사항’ 문건에는 “PD수첩 최승호 PD 전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국정원은 최 PD 전출을 자신들의 ‘성과’로 판단했다.

▲ 백종문 MBC 부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 백종문 MBC 부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아울러 26일 검찰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 받은 이우환 MBC PD에 따르면, 2010년 작성된 국정원 문건에는 ‘PD수첩 제작진 교체’, ‘진행자 없앤다’ ‘포맷 변경’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 역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우환 PD는 “윤길용 국장과 김철진 부장은 ‘성우나 아나운서가 PD수첩 내레이션을 하는 것이 싫다. 그냥 PD들이 읽으라’는 취지로 포맷 변경을 지시했는데 그들은 국정원 문건을 이행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작성 시점과 격차는 있지만 국정원의 ‘MBC 장악 문건’은 대부분 이행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같은 날 참고인 조사를 받은 정재홍 전 PD수첩 작가에 따르면, 2010년 3월2일 작성된 국정원 문건에는 “PD수첩 프리랜서 작가까지 교체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이 역시 2년 뒤 현실화했다. MBC는 2012년 7월 정 작가를 포함해 PD수첩 작가 6명을 전원 해고했다. ‘김재철 퇴진’을 요구했던 언론노조 MBC본부 조합원들이 170일 파업을 끝내고 복귀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당시 책임자인 김현종 시사제작국장(현 목포 MBC 사장)은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고 해명했으나 내부에선 작가들의 MBC 파업 지지에 따른 ‘보복 조치’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밖에도 이우환 PD는 “국정원 문건의 또 다른 내용에는 ‘좌경 PD·기자 등을 유배·격리시켜야 한다’는 문구가 있었다”며 “문구 밑에는 ‘조직 개편을 통해 외곽·신설 조직을 만들어 유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PD수첩은 보도본부 산하로 보내고 시사교양국은 해체해야 한다는 지침도 있었다”고 말했다. 

▲ 2012년 MBC 파업 당시 김재철 MBC 사장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 2012년 MBC 파업 당시 김재철 MBC 사장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김재철 전 MBC 사장이 해임됐던 2013년 3월 이후에도 안광한·김장겸 MBC 사장으로 이어진 체제에서 MBC 기자·PD·아나운서들은 경인지사, 신사업개발센터, 뉴미디어포맷개발센터 등 비제작부서로 좌천돼 왔다. 또 안광한 전 사장 시절인 2014년 10월 교양국 해체를 골자로 한 대대적 인사·조직 개편이 단행됐다는 점에서 국정원의 MBC 장악 플랜은 수년에 걸쳐 구축된 셈이다.

국정원 문건을 그대로 이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MBC 전·현직 임원들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윤길용 MBC NET 사장은 27일 미디어오늘에 “통화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고 김철진 원주 MBC 사장은 “그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백종문 부사장과 김현종 목포 MBC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재철 전 사장은 지난 18일 오후 미디어오늘에 “내가 MBC를 경영하는 동안 국정원이나 청와대와 MBC 사태를 논의한 바 없다”며 “MBC 출신으로서 나는 내 방식대로 MBC를 경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