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KBS에 입사한 베테랑 PD는 지난 9년 간 한직을 전전했다. 그가 제작한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차마고도’는 2008년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고 에미상에도 노미네이트됐다. 그런 그는 이명박 정부 들어 제작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가 공개한 MB국가정보원의 방송장악문건에 따르면 2010년 국정원은 그를 ‘정연주 추종인물’ 이라며 ‘무관용 원칙’으로 축출해야 한다고 지목했다. 그는 이상요 전 KBS PD(62)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5일 이 전 PD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인근에서 만나 최근의 심경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 국정원 블랙리스트에서 지목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어땠나.

“리스트에 오른 다른 사람들은 황당해하더라. 나는 한직으로 옮겨 다녔고 내가 관리대상이라는 걸 대충 짐작하고 있어서 충분히 (국정원이)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국정원 문건은 엉터리로 작성된 느낌이다. 내부 협조자라는 사람이 자기 판단대로 대충 정보 던져주고 국정원이 써낸 자료 같다.”

- 누가 내부 정보를 국정원에 건넸을까.

“전두환 정권 때 언론 통폐합이 있었다. 그때 언론사마다 할당을 주고 ‘문제적 언론인’을 지목하라고 했다. 실제로 해직도 많이 됐다. 리스트에 오른 인물 가운데 리스트 작성자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같이 끼워 적어낸 경우도 있다. 현재 KBS에도 1985년 이후, 전두환 정권 때 들어온 사람들이 아직 있다. 그 시절에 정권 차원에서 KBS에 특채로 내려 보낸 인물들이다. 민주정의당 직원, 국정원, 학도호국단 간부 출신 등이다. 그나마 이후 노조가 생기면서 특채는 안 된다고 해서 못 뽑게 됐다. 이제는 정년이 차 거의 다 나갔지만 KBS에는 아직 학도호국단 출신이 10명 이상은 남아있다.”

▲ 이상요 전 KBS PD가 지난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이상요 전 KBS PD가 지난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국정원 직원들이 KBS에 상주하면서 사찰하는 모습을 봤다는 얘기도 있다.

“80년대 후반까지는 KBS 안에 경찰이나 국정원 직원 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주 오고갔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 감시한다고 학내에 형사들이 많았는데 학교에서 만났던 형사를 1986년 KBS 로비에서 만나기도 했다. KBS 로비에서 서로 알아보고는 ‘어 이게 누구야’하며 놀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부터는 KBS 안에 직접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밖에서 망원을 활용했을 것이다.”

- 이명박 정권 이후 간부들로부터도 소위 ‘찍혔구나’하고 느꼈던 사례가 있나.

“‘좌빨 아니냐’, ‘정연주 오른팔 아니냐’ 이런 식으로 간부들이 말하더라. 이명박 정권 이후엔 외주제작국이라는 부서에서 계속 물만 먹고 있었다. 거긴 독립제작사가 납품한 프로그램 품질을 검사하고 감독하는 곳이다. 제작을 아예 할 수가 없었다. 또 한 번은 전화가 오더니 ‘원주국장’으로 가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 거긴 부장급 인사가 가는 곳이었다.(그는 이 무렵 국장급이었다.) 화가 나서 못 간다고 버텼더니 방송문화연구소로 보냈다. 박근혜 정권 때까지 계속 그랬다. 환장하겠더라.”

-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비교했을 때 참여정부 KBS 분위기는 어떻게 달랐나.

“일례로 노무현 정권 시절 ‘심야토론’ CP를 맡고 있을 때였다. 청와대에서 내게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심야토론에 출연하고 싶다는 거다. 대신 청와대에서 포맷을 좀 바꾸자고 했다. 그러려면 심야토론 말고 다른 프로그램을 다른 시간대에 편성해서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형식이나 내용 등을 조율하다 서로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대통령이 출연하겠다고 연락했던 사실을 본부장이나 사장에 보고를 안 했다. 복도에서 당시 정연주 KBS 사장을 마주친 김에 얘기한 뒤 보고 못했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정 사장은 ‘밖에서는 나한테 노빠라고 뭐라 하던데 잘 됐네’하고 가버리더라. 그만큼 제작 자율성을 보장했다. 이명박 대통령 주례 연설 방송은 내부에서 반대하는데도 윗사람들이 밀어붙여 결국 성사시키지 않았나.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아이템 하나하나 마음대로 못하게 했다. 출연자 리스트를 보면서 이런 사람은 하면 안 된다, 저 사람은 왜 넣었냐는 둥 맨날 그랬다. 그랬으니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우리 연배 KBS 사람들은 2,3일을 통음했다. 자꾸 윗선에서 개입하니 제작 일선에서도 자기검열이 일상화했다. KBS 조직 전체가 회의감에 빠지고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아이템도 괜찮은 게 있어도 열심히 모아놓고 나중에 해야겠다는 식이었다. 지금 제작하면 변질된 채 방송될까봐 그렇다. (정년퇴임 후인) 2015년 KBS 경영평가위원을 맡아 살펴본 KBS 내부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다. 다들 의욕이 없다.”

-지금 파업하고 있는 후배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가슴이 아프다. 그동안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던 것 아닐까. 그래도 희망을 갖고 힘내서 파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KBS 영향력이 많이 낮아졌다. 회복이 가능할까.

“그래도 에너지가 남아있다고 본다. 조직 건강성을 유지해왔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동안 자포자기해온 분위기를 빨리 걷어내야 한다. 새 경영진이 들어와서 새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다른 대안 언론도 많지만 KBS는 하나의 항공모함에 비유할 수 있다. 상당히 괜찮은 인력들이 많아서 금방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미디어 생태계도 워낙 빠르게 바뀌니 외부에서는 ‘KBS 무용론’이 나온다. 외부의 무용론을 극복하기 위해선 KBS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역할을 잘 해야 한다. 사람들은 결국 잘 만든 방송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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