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완전 파괴”를 언급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 대해 국내 주류 일간지가 “김정은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 의지를 보이라”, “평화에 매달리면 도움이 안된다”며 더욱 극단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조중동 등은 우리가 한미동맹의 신뢰를 줘야 한다고 썼다. 강경하고 호전적인 미국 대통령 주장에 동조할 것을 사실상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주민 2500만 명을 죽이겠다는 끔찍하고 비상식적인 주장에 따끔한 지적은커녕 동조하지 않으면 한미동맹이 깨질 듯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반도 위기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베 수준의 주장”이라는 혹평까지 제기됐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9일(현지시각)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국은 엄청난 힘과 인내가 있지만,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공개적인 협박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유엔 국가 지도자들 뿐 아니라 미국 내 민주당 인사들도 비판했다. 특히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깡패 두목(mob boss)에서나 나올 말”이라며 “미국 대통령이 2500만 인구의 한 나라를 지도상에서 없애겠다고 위협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전쟁시 피해 당사국인 한국의 일간지 가운데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겨레 한국일보를 제외한 주류 일간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딴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가장 황당한 주장을 편 매체는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21일자 사설 ‘문 대통령, 트럼프 능가하는 현실주의로 무장하라’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군사옵션을 비핵화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인식하는 이상, 우리의 대미 외교는 미국이 느끼는 위협을 한국에 대한 위협으로 공감하며 신뢰를 굳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동아는 “동맹국 대통령이 전쟁 불사를 외치는 판에 당사국인 한국이 대화와 평화에만 매달리는 인상을 준다면 국익에 도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뜻이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동아는 “21일 유엔 총회 연설을 하는 문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선명한 메시지를 내놓기 바란다”며 “냉전시대 소련이 군사적 충돌 없이 자멸한 이유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다음과 같은 특별한 주문을 했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 한국의 대통령은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한미 정상회담과 한미일 정상 회동에서도 대북정책에 한목소리를 내 굳건한 한미일 공조 체제를 확인하기 바란다.”

미국 대통령은 북한 주민을 완전히 파괴한다 협박하니, 한국 대통령은 김정은이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느끼게 협박하라는 것이다.

중앙일보도 사설 ‘“북 완전 파괴”라는 트럼프, 대화와 평화 주장하는 문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북핵 해결을 위한 대화 중재를 요청하고 유엔 정상들과 오찬에서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한 것에 대해 “전 세계가 북한을 압박하는 가운데 국제적 흐름과 동떨어진 요청을 한 게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중앙은 “트럼프 대통령의 강공책만큼이나 문 대통령의 유화책에도 불안한 시선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코리아 패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 만큼 문 대통령은 오늘 밤 예정된 첫 유엔총회 연설 등을 통해 이 같은 불안을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고 썼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이 ‘유화책’이며 불안하면 단호히 공격의사를 밝히라는 것인지 의문이다.

조선일보는 사설 ‘트럼프 “북한 완전 파괴”가 시사하는 것’에서 “북핵의 인질로 잡힌 한국민 때문에 미국의 군사 행동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도 “트럼프의 ‘완전 파괴’ 발언에서 보아야 할 것은 북의 핵 ICBM 개발을 멈추려는 모든 외교적 노력이 무산될 경우 무언가 비상한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라고 규정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현지시간)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백악관 영상 캡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현지시간)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백악관 영상 캡쳐)
조선은 “우리 정부의 분위기는 여전히 남 얘기하는 듯하다”며 트럼프 연설이 ‘최대한도의 제재·압박을 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라는 정부 입장을 두고 “납득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20일 국회에서 ‘서울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대북 군사옵션이 있다’는 매티스 장관의 발언에 대해 “보도를 통해 처음 들었다”고 답한 것과 외교부 장관의 대북 인도지원 발언,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참가시 평창올림픽이 안전해진다”고 말한 것을 싸잡아 비난했다. 조선은 “정부가 이럴 수도 있나”라며 “마치 다른 세상 얘기들 같다”고 썼다.

조중동 뿐 아니라 세계일보도 사설에서 “한·미 간 대북 공조와 협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에 이런 기조가 반영돼야 한다”며 “이어지는 한·미 정상회담과 한·미·일 정상 오찬회동에서도 대북 대화나 한반도 운전자론과 관련된 말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화란 말을 자제하고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일까.

국민일보도 사설에서 “공동의 적대적 상대방 앞에서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평화적 중재를 요청하고 대화와 협력을 말한다면 신뢰감이 조성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반해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겨레 한국일보는 트럼프의 연설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는 등 조중동 등과 큰 차이를 드러냈다.

서울신문은 사설에서 “트럼프의 연설은 곳곳에서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라며 “‘미치광이 전략’을 더욱 중시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서울은 “김정은의 비상식적 행동에는 그 이상의 비정상적 대응으로 맞서야 성공을 거둔다는 발상으로, 자칫 군사적 대응에 대한 강한 유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반도가 비정상적 판단의 실험무대가 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북·미 간 대치가 고조될수록 우발적 충돌 가능성은 커가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 상황은 우리의 관리하에 통제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 동아일보 2017년 9월21일자 사설
▲ 동아일보 2017년 9월21일자 사설
한국일보도 사설 ‘트럼프의 “북한 완전 파괴” 경고가 던지는 우려’에서 문 대통령의 국제사회 공조와 평화적 해결 촉구 입장과 관련해 “한미동맹의 기조를 지키고 국제사회의 기류와 궤를 같이하면서도 한반도 문제의 당사국으로서의 입장도 분명하게 밝힐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주문했다.

경향신문은 사설 ‘깡패 두목 같은 유엔 연설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트럼프’에서 “연설 내용만 봐서는 세계 지도자가 아니라 깡패 두목을 방불케 한다”며 “북핵 문제가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2500만명의 생명과 삶을 파괴하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경향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지도자들과 언론이 일제히 비판과 우려의 반응을 내놓았다. 당연한 일”이라며 “북핵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한반도 긴장만 고조시키는 트럼프의 도발적 언어에 동조할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트럼프 연설 어디에서도 세계가 직면한 위협을 해소하기 위한 진지한 대안과 숙고가 없다는 점을 이 신문은 지적했다. 경향은 “트럼프는 대책 없이 막말을 쏟아내고 돌아설 뿐”이라며 “국제사회를 이끌 책임을 진 지도자의 자세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고 썼다.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제기구인 유엔에서 트럼프가 한 연설을 두고 경향은 “세계 각국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인 자리를 전쟁 위협 무대로 활용함으로써 유엔을 모욕했다”고 혹평했다.

경향은 “북핵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선동적이고 무책임한 협박만 일삼는 트럼프에게 세계의 지도자라는 호칭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며 “ 트럼프의 유엔 연설이 남긴 것은 김정은 못지않게 세계 평화에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뿐”이라고 평가했다.

한겨레도 사설 ‘‘평화’ 내던지고 ‘호전성’만 드러낸 최악의 유엔 연설’에서 “미국 대통령이 ‘평화의 전당’인 유엔 무대에서 이처럼 전쟁을 불사하는 듯한 비난을 퍼부은 건 전례 없는 일”이라며 “트럼프 발언이 북한으로 하여금 군사적 위협에 굴복해 핵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핵을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작동할까 국제사회는 우려한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북한을 완전 파괴하겠다’는 말은 김정은 정권뿐 아니라 2500만 북한 주민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들린다는 점에서 매우 부적절하다”며 “김정은 정권은 트럼프 발언을 주민 결집용으로 이용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김정은을 돕고 있는 셈”이라고 썼다.

▲ 중앙일보 2017년 9월21일자 사설
▲ 중앙일보 2017년 9월21일자 사설
우리 정부에 대해 한겨레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정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되며 평화적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며 “고삐 풀린 듯한 트럼프 대통령의 북핵 정책에 끌려다니지만 말고, ‘압박과 대화’를 병행해서 한반도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기조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회원국들 앞에서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문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대외부총장(교수)은 2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한반도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진정한 한미동맹은 평화와 같이 가야지, 한반도의 긴장으로 가는 동맹은 진정한 동맹이라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지난 이명박 정부 당시 역대 최고의 한미동맹 관계라고 했지만 한반도 상황은 역대 최악이었다면서 “역사의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동맹은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북핵문제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통일이라는 ‘미래’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북핵이라는 현재 문제만 보는 미국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동아일보 주장에 대해 “한반도 문제에 대해 미국이 한국의 입장을 수용해야 한다”며 “그러나 동아일보 논조는 한반도 문제조차 미국의 입장을 따르고 글로벌한 문제도 미국을 따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게 종속국가론이지 무슨 동맹이냐”고 반문했다. 양 교수는 “그럼 우리도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얘기인 것인지 동아는 답을 해야 한다”며 “이런 위험한 발상엔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평화와 대화를 거론한 것이 부적절했다는 조중동과 세계, 국민의 주장에 대해 양 교수는 “북한이 국제 규범을 위반한 것에 대해 제재 압박을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우리는 한반도 문제 당사자이고, 미국과 유럽 등은 지역적으로 한반도와 떨어져 있다”며 “어떻게 국제사회 인식과 모든 것이 다 똑같을 수 있겠느냐. 보편적 가치는 같아도 인식과 처방은 같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양 교수는 “북한의 도발에 대한 피로감이 있다해도 이럴 때일수록 좋은 해법을 내놓으면 우리 국민은 이해하게 돼 있다”며 “하지만 동아처럼 이렇게 즉흥적, 충동적인 주장은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일베 수준의 대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미국 내에서조차 언론이 합리적인 시각으로 트럼프 언행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한국 언론만 미국 대통령의 주장에 동조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충돌과 전쟁은 해법이 될 수 없으며, 문 대통령이 평화 강조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해법”이라고 덧붙였다.

▲ 조선일보 2017년 9월21일자 사설
▲ 조선일보 2017년 9월21일자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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