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성재호 본부장, KBS본부) 사무실에 모인 KBS 기자와 PD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들은 국정원에서 만든 KBS ‘블랙리스트’ 문건에 실명으로 거론된 인사들이다. 민감한 아이템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이들은 보직에서 배제되고 국정원이 자신들을 ‘좌편향’이라고 지목했던 것 같다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KBS본부는 2010년 6월 국정원이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추진방안’이라는 보고서의 일부 내용을 입수해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사실상 국정원이 KBS 인사에 개입해 기자와 PD 등의 성향을 분류하고 ‘언론노조’ 소속 등 특정 인사들의 퇴출을 종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문건’에 실명이 거론된 이상요 PD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정권 이후 보직 한번 받지 못하고 평PD로 지내다 2014년 정년퇴임했다. 이 PD는 2004년을 전후로 소위 ‘문제적’ 프로그램을 여럿 제작했던 경력 때문에 2008년 이전부터 회사 안팎으로 찍혔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이상요 전 KBS PD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이상요 전 KBS PD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이 PD가 2004년 ‘인물 현대사’라는 프로그램CP를 맡았을 때 이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인물은 여운형, 조봉암, 함석헌, 전태일 등이었다. 이 PD는 “그동안 역사에서 조명받지 못한 인물을 집중 조명한 건데 프로그램이 좌파적이라는 평가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찍힌’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KBS스페셜 CP를 맡았을 때 제작했던 프로그램을 꼽았다. 이 PD가 언급한 방송은 1987년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KAL858의 미스터리’ 편이다.

이 PD는 “그동안 회사에서 계속 관리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회사 간부가 지나갈 때마다 한 마디씩 툭툭 던졌는데, (국정원 문건이 공개된)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이 던진 그런 말들이 회사 밖에서 만들어진 워딩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당시 ‘취재파일 4321’ 팀장이었던 용태영 KBS 기자는 이번에 공개된 국정원 문서에 “정연주 전 사장을 추종하는 인물로 새노조(KBS본부)를 비호하고 반정부 왜곡보도에 혈안”이 됐다고 지목된 인물이다. 문건에서 ‘왜곡보도’ 사례로 지목한 보도는 ‘한명숙 무죄’, ‘4대강’, ‘봉하마을’ 관련 아이템이었다.

▲ 용태영 KBS 기자가 부당한 인사조치를 당했던 경험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용태영 KBS 기자가 부당한 인사조치를 당했던 경험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용 기자는 “보도 내용을 보면 굉장히 드라이하다. 반정부 왜곡보도가 아니다”라며 “국정원이 이런 보도를 반정부 왜곡 보도 사례로 꼽은 걸 보면 국정원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걸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용태영 기자는 ‘취재파일 4321’ 팀장을 맡은 지 6개월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용 기자는 “어느 날 국장이 부르더니 ‘딴 데 가야한다’며 이유도 없이 인사 발령을 냈다”며 “사실 보직을 맡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갑자기 데스크 자리에서 물러난 건 확실히 (국정원에서 지목한)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정원 문건에 따르면 소상윤 라디오국 PD는 ‘여전히 좌편향 PD들과 연계하며 편파 방송을 꾸몄다’는 ‘혐의’를 받았다. ‘반미 종북 시각의 드라마 제작을 추진한다’는 이유도 함께 따라붙었다. 소 PD는 이 문건이 작성된 지 2개월 이후 부장직에서 물러났다.

소 PD는 자신이 지목된 이유를 KBS1라디오 ‘열린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이라고 추측했다. KBS 라디오 간판 시사프로그램이었던 ‘열린토론’은 2013년 명확한 이유도 없이 폐지됐다. 소 PD는 “이 프로그램을 좌편향 프로그램으로 봤기 때문에 나중엔 프로그램마저 없앴던 것”이라고 말했다.

▲ 소상윤 KBS PD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소상윤 KBS PD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소 PD는 자신이 ‘좌파 세력’을 비호했다고 설명한 국정원 문건에 대해 “새노조(KBS본부) 소속 라디오 PD 후배들과 뜻을 같이 하거나 친하게 지냈던 것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며 “본부 노조원들을 좌파세력으로 규정한 것 같아 어이가 없고 씁쓸하다”고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한겨레가 18일 단독보도한 내용과 같은 문건으로, KBS 새노조 ‘파업뉴스’팀에서도 입수한 것이다. 다만 원본을 입수한 것이 아니라 KBS 인사 관련 내용만 입수했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작성하고 실행한 언론 장악 문건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한 것은 KBS 새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부터 철저히 업무에서 배제돼온 정황이 국가 기관 문건으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이번 문건을 취재한 ‘파업뉴스’팀 엄경철 기자는 “2010년부터 우리 조합원 소속이면 특파원도 보내주지 않았다”며 “팀장 부장을 하려면 조합을 탈퇴하라는 강압적인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엄 기자는 “KBS라디오 패널로 출연 섭외가 들어왔는데 ‘너무 올드하다’는 등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갑자기 출연 취소가 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엄경철 기자는 새노조위원장(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출신이다.

▲ 18일 오후 KBS새노조 사무실에서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보고서에 지목된 당사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 18일 오후 KBS새노조 사무실에서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보고서에 지목된 당사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엄경철 기자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엄 기자는 “열흘 간 취재해서 겨우 얻어낸 것이 이 두 장 짜리 보고서였다”며 “국정원은 지금까지 내부 문건을 단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다면서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반헌법적으로 언론 기관을 사찰해 방송 장악 보고서를 만들었다면 해당 기관에는 공개하고 국민에게도 사과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