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과 국정원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박 시장이 민간인 시절이던 2009년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의 ‘비리의혹 폭로’를 지시했고, 이에 국정원 심리전단이 다음 아고라, 트위터 등에 비판글을 게재함과 동시에 보수단체를 동원해 박 변호사를 비판하는 시국광고를 내는 등의 활동을 했다.

박 시장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과 퇴출 활동이 실체를 드러낸 건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이 한창이던 2013년 5월이었다. 당시 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공개한 이른바 ‘박원순 시장 제압 문건’은 국정원이 정당한 직무범위를 넘어서 국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온 사실을 드러냈다.

첫번째 문건은 2011년 11월24일 작성된 것으로,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 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이라는 제목으로 박 시장이 “야세 확산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어 면밀한 제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건은 대응방향으로 “아직 박 시장의 시정 운영에 대한 명확한 긍·부정적 여론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현 시점에서의 어설픈 견제는 역풍만 초래할 가능성 다분”하다며 “명백한 불·편법 행태에 대해서는 즉각 대응하되, 여타 편파·독선적 시정 운영은 박 시장에 대한 불만여론이 어느 정도 형성될 때까지 자료를 축적, 적기에 터뜨려 제압하는 등 단계적·전략적 대응”을 한다고 돼 있다.

▲ ⓒ 연합뉴스
▲ 박원순 서울시장 ⓒ 연합뉴스

또 “저명 교수·논객들을 동원, 언론 사설·칼럼을 통해 시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기획 시리즈로 쟁점화, 일반 시민들에 정확한 허상 전달”이라고 쓰여 있다.

문건은 또한 보수단체의 행동 계획으로 “자유청년·어버이연합 등 범보수 진영 대상 박 시장의 좌 경사 시정을 규탄하는 집회·항의 방문 및 성명전 등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한다고 했다.

여당 소속 서울시의원들을 활용한 박원순 시장 제압 방안도 담겼다. 문건은 “여당 소속 시의원(28명)들에 시 예산안에 대한 철저한 심의를 독려하는 한편, 박 시장의 시정 운영 무책임성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로 활용”한다고 돼 있다. 그리고 서울시 지하철 해고자 문제와 관련해 “경총·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을 통한 비난 여론 조성과 함께 공공기관 경영평가 시 불이익 방침”이라는 계획이 나온다.

두번째 문건은 반값 등록금 관련이다. 2011년 6월1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이라는 문건은 야권과 진보진영의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한 심리전 계획을 담고 있으며 개별 정치인들을 표적으로 하는 인신공격성 논리도 수립하고 있다.

문건엔 “야당·좌파 진영에서는 당·정이 협의하여 등록금 부담 완화대책을 마련키로 했음에도 ‘등록금 인상=정부 책임’ 구도 부각에 혈안”이라며 “2007년에 비해 국가장학사업 총 규모가 6배 이상 증액(918->5,218억원) 되었음에도 ‘저소득층 장학사업 축소’라며 거짓 선동”한다고 쓰여있다.

국정원 문건은 심리전의 소재로 “각계 종북좌파 인사들은 겉으로는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면서도, 자녀들은 해외에 고액 등록금을 들여 유학 보내는 등 이율배반적 처신”이라며 이를 “야권의 등록금 공세 허구성과 좌파 인사들의 인중처신 행태를 홍보자료로 작성, 심리전에 활용함과 동시에 직원 교육자료로도 게제”라고 돼 있다.

문건에 나온 계획들은 고스란히 실행으로 옮겨졌다.

첫번째 문건 작성 시점 나흘뒤와 다시 열흘 뒤 문건에 적시된 자유청년연합·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들의 박원순 시장 규탄 사위가 있었고, 경총은 서울시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관련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정원 문건에서 “선거운동 과정에서 불거진 병역 면탈·자녀 서울대 법대 전과 등 자질·도덕성 문제를 끝까지 추적”한다는 방침과 같이, 이른바 ‘사회지도층 병역비리 감시단’도 발족했다.

▲ ▲ 법원에 출두하며 지지자로부터 거수경례를 받는 원세훈 전 원장(왼쪽)과 법정구속 당시의 모습(오른쪽) ⓒ 연합뉴스
▲  법원에 출두하며 지지자로부터 거수경례를 받는 원세훈 전 원장(왼쪽)과 법정구속 당시의 모습(오른쪽) ⓒ 연합뉴스

문건이 공개되자 국정원은 자신들이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고 발뺌했다. 검찰은 국정원 서버에 대한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고 “국정원 측으로부터 보고서 서식을 제출 받아 비교했지만 양식이 달라 국정원 공식 문서로 보기 어렵다”고 수사를 종결해버렸다.

그러나 이 문건은 국정원의 표기 방식과 보고체계, 그리고 국정원 직원들의 실명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를 두고 은폐 논란이 벌어졌다.

첫번재 문건을 보면 작성일 내 괄호 안에 ‘2-1’은 국정원 2차장 산하의 정보수집·전략부서인 국익전략실을 나타낸다. 문서에 실명으로 나오는 ‘B실 사회팀 6급 조 모’ 그리고 하단에 등장하는 함모(4급) 추모 팀장 등은 한겨레 보도 당시 국정원 직원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 추모 팀장은 바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비선보고를 했다는 국정원 추 전 국장이다.

두번째 문건 역시 ‘2-1’, 즉 국익전략실이 작성한 것이며 배포선으로 ‘배포:0-0, 2-0, 3-0’ 즉 원장, 2차장, 3차장을 명시하고 있는 국정원 양식이다.

박원순 시장 제압 문건은 검찰이 국정원 문서가 아니라고 부인하며 이내 잠잠해졌지만, 2016년 4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판과정에서 국정원-전경련-어버이연합의 커넥션이 불거지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정원이 전경련 등 경제단체를 통해 보수단체를 지원하고 활용한 정황이 나오면서 문건의 내용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2016년 8월엔 박원순 제압 문건을 작성한 곳이 국정원 국내정보 분석국이며 “실제 국정원에서는 박 시장에 대해 이 문서에 나온 그대로 기획하고 실행했다”는 국정원 전 직원의 증언이 나왔다. 전직 직원을 인터뷰한 시사인은 “어버이연합에는 국정원 퇴직자 모임의 한 간부를 통해 자금을 대고 관리했다”는 진술도 보도했다.

국정원 내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문서양식과 국정원 직원들의 실명 그리고 실행정황까지 모두 드러났지만, 이 문건이 국정원 문건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은 결국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가능했다. 국정원 개혁위가 지난 11일 발표한 ‘적폐청산 T/F’의 조사결과는, 이 두 문건 외에 국정원이 2009년부터 민간인 박원순을 상대로 사찰활동을 벌였음도 확인했다.

국정원 개혁위에 따르면 첫번째 문건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 운영 실태 및 대응방안’은 2011년 11월 원세훈 전 원장이 박원순 시장을 ‘종북인물’로 규정하고 간부회의 등에서 견제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함에 따라 작성됐다. 문건은 원 전 원장에게 보고된 후 심리전단 등에 배포됐다. 이후 심리전단은 온·오프라인 상에서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와 협조 가두집회(2011.11.28)ㆍ1인 시위 개최(2011.12.1~12.7) 및 비판광고 게재(2011.12.1) △박원순 시장 비판칼럼 언론기고(2011.11.28) △다음 「아고라」에 ‘서울시장 불신임 이슈청원’을 개설, 서명운동 전개(2011.11.25) 등 계획된 활동을 수행했다.

두번째 문건인 ‘등록금 문건’은 2011년 5월 원세훈 원장 등의 지시로 작성됐고 심리전단을 통해 시민단체 등을 활용한 맞대응 시위ㆍ시국광고 게재ㆍ칼럼 및 댓글 게재 등의 활동이 수행됐다.

국정원 개혁위 발표에서 주목해 볼 대목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민간인 시절이었던 2009년 9월 국정원이 그를 사찰한 대목이다. 당시 국정원은 박원순 변호사가 ‘민간사찰’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원세훈 전 원장은 ‘박원순 비리의혹 폭로’ 등 비판활동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 시장이 제기한 의혹은 희망제작소와 행정안전부가 맺은 계약 및 하나은행의 후원사업 무산에 국정원이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정원 심리전단은 2009년 9월18일~30일의 기간에 △다음 아고라에 ‘박원순 변호사 적반하장 행태 및 이중성’ 규탄 토론글ㆍ댓글(1,000여건) 게재 △인터넷매체 등 협조 ‘박원순의 두 얼굴’ 논평ㆍ칼럼 게재 및 일간지 독자투고 △박 변호사 비판 사이버콘텐츠(웹툰ㆍe-만평 등) 제작ㆍ확산 △보수단체 협조, ‘박원순 규탄’ 시국광고 중앙일간지 게재 등의 활동을 벌였다. 또한 1년뒤인 2010년 9월1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국정원이 박원순 변호사측에 패소하자, 원 전 원장은 판결을 ‘좌편향’으로 규정하고 법원판결 규탄 및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비판활동 강화를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심리전단은 △다음 아고라에 판결 부당성 토론글 게재 △인터넷 언론에 판결 비판칼럼 게재 △트위터에 ‘박원순의 국가명예 훼손 실체적 진실’ 단문 확산 등의 활동을 한다.

박 시장에 대한 국정원의 활동을 보면, 국정원이 정치개입 만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시민사회 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민간사찰과 견제·퇴출 활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국정원 개혁위는 최근 명진스님에 대한 불법사찰과 퇴출에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을 확인하고 ‘사회 주요인사 불법사찰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시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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