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사고는 공영방송의 ‘잃어버린 기억’이다. 2014년 4월 참사 당시 전원 구조 오보,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노골적인 침묵, 나아가 유가족 폄훼 보도와 사실 왜곡까지. 진실과 동떨어진 세월호 보도는 공영방송사(史)에서 아물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있다.
세월호 보도를 망가뜨린 ‘언론 부역자’들은 자사 비판 언론인에 재갈을 완벽히 물렸지만 엄혹한 세월에도 누군가는 MBC라는 이름으로 세월호를 기록하고 진실을 추적했다.
박영훈 목포 MBC 기자(47·1997년 입사)는 4월16일 세월호 사고 현장을 가장 먼저 찾았다. 사고 현장 앞은 그의 고향(서거차도)이기도 했다. 그가 선박을 섭외해 현장을 확인한 뒤 목포 MBC는 전원 구조 보도의 오보 가능성을 서울 MBC에 보고했다. 박상후 MBC 전국부장(현 시사제작국 부국장)은 이를 묵살했다. 이후 박 부국장은 ‘세월호 유가족 폄훼’ 리포트와 막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시 서울 MBC 보도국장은 현 김장겸 사장이었다.
김진선 목포 MBC 기자(31·2011년 입사)는 서울 MBC에서 ‘금기어’로 통용됐던 세월호를 4년째 취재 중이다. 김 기자는 “서울 MBC에서 우리 보도가 다뤄지지 않더라도, MBC 카메라가 현장에 있었고 MBC 기자가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남겨야 했다”고 말했다. 두 기자가 세월호 취재를 잠시 중단하고 서울을 찾았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돌마고(돌아와요 마봉춘 고봉순)’ 집회에 참석하기 전 그들을 만났다. MBC가 지난 3년 동안 금기시하고 경멸했던 세월호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 현수막 퍼포먼스가 화제였다.
박영훈(이하 박) : “수상자 명단을 보니 언론노조 MBC본부 조합원 중에선 나뿐인 것 같았다. 다 같이 파업에 들어가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같이 힘내자’, ‘꼭 승리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 퍼포먼스 이후 주변 반응은? 시상식이 마냥 편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박 : “페이스북 응원도 많았고 조합원들과 시민들도 많은 응원을 해주셨다. 무한도전 김태호 PD가 시상식에 불참한다는 소식도 있었고, 그래서 시상식장에 가지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참석하되 그 자리에서 뭔가 보여주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 두 분 기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세월호’다. 참사 당일 현장 상황은 어떠했나?
박 :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다른 언론사보다 2시간 정도 빨랐던 것 같다. 사고 현장은 내 고향(서거차도) 앞이기도 했다. 그날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현장에서 느낀 건 ‘도저히 구조할 수 있는 시간적 상황과 여건이 안 됐다’는 것이었다. 배가 선수만 보이는 상태였다. 주변 배들은 세월호 주변을 빙빙거릴 뿐이었다.”
오전 9시(세월호 침몰 신고가 최초 접수된 시간은 오전 8시52분)가 조금 넘은 시각 여객선 사고 제보 전화가 목포 MBC 보도국에 울렸다. 박 기자는 제보를 바탕으로 기본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생방송으로 보도한 뒤 현장으로 향했다. 김 기자 역시 장비를 챙기고 뒤따랐다. 당시 한승현 부장을 포함해 남은 이들은 연락 가능한 모든 곳을 취재해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 대형사고 시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보도국 모습이다. 박 기자를 포함한 현장 기자들의 목격을 토대로 목포 MBC는 전원구조가 아니라는 보고 내용을 서울 MBC에 전달했으나 묵살됐다.
- 현장 기자 목격을 토대로 올라간 보고가 묵살되는 경우가 또 있었나?
박 : “그게 참…. 올해 MBC에 입사한 지 만으로 20년인데, 그동안 대형사고가 발생할 때면 현장 기자는 뉴스에 참여했었다. 그래서 세월호 때도 내가 직접 (서울 MBC와) 전화 연결이 될 줄 알았다. 과거 MBC였다면 그랬을 거다. 우리가 현장에 있었으니 가장 정확히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부르지 않았다.”
- 영화 ‘공범자들’에서도 세월호와 목포 MBC 이야기가 나온다. 감상 소감은?
박 : “많이 울었다.(울컥)”
김 : “선배는 자주 운다. 세월호 이야기할 때면.”
박 : “거창하게 슬프거나 그런 것보다 순간순간 울컥하게 된다. 트라우마라고 해야 하나. ‘대체 그때 그들(서울 MBC 간부들)은 왜 그랬지?’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다.”
- 보도국장이었던 김장겸 MBC 사장은 세월호 유족을 ‘깡패’로 지칭했다. 또 보고를 묵살한 박상후 부국장은 세월호 유족 폄훼 리포트로 비난을 샀는데?
박 : “언론인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 로컬 시간(편집자주 : 지역 MBC의 경우 뉴스 초반 20여 분 동안 서울 MBC 리포트를 내보낸 뒤 지역 뉴스로 전환한다)에 다른 뉴스 대신 세월호를 보도했던 이유다. 비록 우리 뉴스는 목포 권역 밖으론 나가지 않지만 이것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니까.”
박 : “김장겸 그들이 현장을 단 한 번이라도 찾았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현장을 찾고서도 그랬다면 인간의 공감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들은 세월호 문제를 자기 문제가 아닌 다른 세계 이야기로 인식했다. 취재 현장이 아프면 기자도 같이 아파하고 슬프면 함께 슬퍼하고, 숨기는 게 있으면 밝히려고 하는 게 기자 아닌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결코 믿지 않으려는 것이다.”
- 세월호 취재 과정에서 서울 MBC와 충돌은 없었나?
김 : “이를테면 지난해 9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3차 청문회 땐 가지도 못했다. ‘목포 권역을 벗어나 왜 서울 걸 너희가 하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에 출석해야 했던 MBC 간부(안광한 전 MBC 사장·이진숙 대전 MBC 사장·박상후 부국장)들도 있었으니까 여러모로 심기를 거슬렀던 것 같다. 정작 서울 MBC에선 세월호 취재를 와도 자리만 차지할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엔 시용·경력만 왔었다.”
박 : “과거 MBC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1993년 아시아나항공기가 전남 해남에 추락했다. 그때 지역 MBC가 촬영한 영상이 해외 유력 언론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MBC가 특종을 했다. 지금은 쫓겨난, 걸출한 서울 MBC 선배들이 다 현장을 찾았다. 지역과 서울 MBC의 협조 시스템이 빛을 발휘한 경우다. 그런 게 불과 몇 년 만에 다 무너졌다.”
- 취재 현장에서 MBC에 대한 비난 여론이 어떠했나?
김 : “무엇보다 ‘찍어봤자 내보내지 못할 거면서 뭐하러 찍느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럴 때마다 MBC 이름으로 서울 방송엔 나가지 않더라도 ‘MBC가 이 자리에서 기록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다. MBC 기자인 내가 못마땅하셨던 한 어머니가 우리 목포 MBC 방송을 보고는 ‘우리 아이가 방송에 나온 걸 처음 봤다’며 계속 반복 재생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울컥한다.”
박 : “세월호뿐 아니다. 노동 현장, 농민 집회에 나가도 ‘제대로 쓰지 않을 거면서 왜 촬영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예전엔 ‘왜 MBC는 안 오느냐’며 MBC부터 찾았던 분들이다.”
- 문제적 서울 MBC 보도들이 지역 MBC에서 송출될 때 어떤 생각이 드나?
박 : “지금 파업 국면에서 나오는 뉴스들이 대표적이다. 김장겸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언론장악’으로 둔갑시켰다. 지역 MBC 사람들이 보고 기겁을 하더라. 저런 걸 어떻게 출고시키는지 의아해한다. 우리가 서울 리포트를 수정할 수는 없다. 서울 리포트가 나올 때는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고 지역 MBC 뉴스가 나갈 때 다시 돌아오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다. 민감한 정치 이슈가 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서울에서 또 작품 하나 만들어 보내겠구나’였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지금 목포 MBC에선 (파업으로 인해) 창사 이후 최초로 지역 뉴스가 전면 중단되고 있다.”
김 : “시청자들은 MBC가 보기 싫으면 그냥 채널을 돌리시면 되지만 우리는 지역 뉴스를 하기 위해 20분은 봐야 한다. 볼 때마다 다들 한숨이다. 지금은 서울 뉴스만 나오고 있는데 사실 그게 더 심각한 상황이긴 하다.(웃음) 방송을 송출하는 조합원들이 모두 파업에 참여했다.”
박 : “지역은 이중으로 힘든 구조다. 현재 목포 MBC 사장은 김현종씨다. PD수첩 PD들을 탄압하고 PD수첩을 망가뜨린 인물로 꼽힌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이사장과 김장겸 MBC 사장만 물러간다고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지역 MBC에 내려온 낙하산 사장과 그들을 도와주며 동료들을 괴롭히는 ‘지역의 부역자’들도 정리해야 한다. 또한 서울과 지역 간 훼손된 네트워크 구조도 지금처럼 종속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로 부활해야 한다.”
- 5년 전과 달리 이번엔 이길 수 있다고 보나?
김 : “입사 6년차인데 두 번째 파업이다. 2012년 파업은 수습을 떼자마자 들어갔다. MBC에 들어오자마자 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세월호가 터졌고 계속 ‘기레기’로 살았다. 약자들에게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는 언론사로 전락했다는 자괴감이 크다. 이기지 못하면 기자라는 직업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박 : “이 싸움 질 수가 없다. 물론 MBC 언론인들은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싸워왔지만 이번 싸움은 국민들이 만들어주신 거다. 2012년보다 더 큰 목소리로 시민들이 지지해주고 있다. 동료들은 MBC를 영광스러웠던 과거로 돌려야 한다고 하는데 예전으로 돌아가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훨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적폐 인사 청산을 넘어 우리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국민들 시선에서 MBC가 그동안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 못 다한 말이 있다면.
박 : “내가 세월호 유족을 대표할 자격은 없다. 다만 김장겸, 박상후 등으로부터 사과는 받고 싶다. 단 한 차례의 사과도 없던 그들은 ‘너무나 나쁜 언론인들’이었다. 세월호 이후 언론인으로 산다는 건 창피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을 취재한 기자인데, 이후 3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없다. 지금까지 침몰 원인을 제대로 못 밝히고 있다. 진상규명에 대한 보도는 점점 줄고 있다. 상당수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일부 잘못된 보도가 있더라도 국민들은 기레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거다. KBS·MBC 기자들이 파업하는 이유는 ‘단어의 복원’에 있다. 기자를 언제까지 기레기로 놔둘 건가. 그래서 더더욱 ‘고영주-김장겸’, ‘이인호-고대영’, 그리고 ‘낙하산 사장’ 체제는 안 된다. 이들이 있는 한 MBC에 붙은 기레기 딱지를 떼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겨야 한다.”
김 : “16살 때부터 MBC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선배들처럼 영광스럽고 멋있는 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MBC 기자가 되고 싶다. 지금의 모습은 내가 꿈꿨던 MBC가 아니다. 파업 때문에 세월호 취재를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빨리 승리해 다시 취재 현장에 서고 싶다.”
그는 “내가 여러분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건 여러분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편하게 근무하라는 게 아니라 내가 또다시 죽고 싶지 않아서, 내가 언론 때문에 또 다른 고통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이 만들어주고 국회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양심과 목숨, 삶을 걸고 언론의 독립성을 따내야만 끝까지 언론 독립성을 지켜낼 수 있다”고 절규했다.
집회가 끝난 뒤 예은 아빠 절규를 곱씹으며 문득 목포 MBC 두 기자의 반성과 자책, 그리고 ‘MBC 재건’을 위한 다짐을 떠올렸다. “기자들이 사실을 검증하고 정부를 비판해 세월호가 하루빨리 올라오게끔 했어야 했어요. 세월호가 침몰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고 많은 진실이 감춰지게 된 건 우리 같은 무능력한 기자들 때문이에요.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4월16일 그날로 돌아가 사고 원인을 밝히는 겁니다. 그걸 못 밝히면 우리는 4월16일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