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의 표적이 된 것은 100만 촛불집회의 열기가 한 풀 꺾이던 그해 7월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취임 100일만에 10%대까지 떨어졌고, 6월19일 대국민사과를 발표한 이명박 대통령은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검찰은 7월 대통령기록물 반출과 관련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진들을 줄소환하는 동시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12월이 되자 검찰은 박 회장으로부터 640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친형 노건평 씨를 구속했고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조카 사위 등이 검찰에 잇따라 소환하며 노 전 대통령을 심리적 한계선까지 몰아세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른바 ‘논두렁 시계’ 보도들는 노 전 대통령의 4월30일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터져나왔다.

그 첫 보도는 KBS였다. KBS는 2009년 4월22일 ‘회갑 선물로 부부가 억대 시계’라는 단독 리포트를 통해 “박연차 회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 측에 고가의 명품 시계 2개를 건넸다”며 “보석이 박혀있어 개당 가격이 1억 원에 달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위스 P사의 명품 시계였다”라고 보도했다.

▲ 2009년 4월30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09년 4월30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당시 문재인 변호사(현 대통령)는 “범죄사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을 두고 검찰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노 전 대통령 부부가 회갑 선물로 받았다는 시계들은 수사중인 혐의와는 분명 무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검 수사기획관인 홍만표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측이 기분나빴을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관련내용을 언론에 흘린 검찰 내부자를 색출하겠다”면서 오히려 명품 시계 보도를 검찰 차원에서 확증해주었다.

이틀뒤인 4월 24일 조선일보는 ‘盧부부가 받았다는 1억짜리 ‘피아제’ 시계, 국내 매장에 5~6개뿐…문재인 “망신주자는 거냐”’라는 기사를 통해 논란을 부채질하고 나선다.

이어 5월13일엔 SBS 단독보도로 “권양숙 여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명품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리포트를 내보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열흘 전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국정원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인규 전 중수부장의 폭로 이후다.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2015년 2월25일 경향신문을 통해 “2009년 노 전 대통령 수사 내용 일부를 과장해 언론에 흘린 건 국가정보원”이라고 밝혔다.

이인규 씨의 폭로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대목은 ‘논두렁 시계’라는 표현이었다. 그에 따르면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시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노 전 대통령이 ‘시계 문제가 불거진 뒤 (권 여사가) 바깥에 버렸다고 합디다’라고 답한 게 전부”이며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국정원이) 말을 만들어서 언론에 흘린 것”이라는 것이다.

이인규 씨는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정원 개입이 “(언론까지) 몇 단계를 거쳐 이뤄졌으며 나중에 때가 되면 밝힐 것”이라고도 했다.

경향신문은 이인규 씨의 이같은 증언과 함께, 2009년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이 있기 전 이인규 중수부장에게 사람을 보내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하되 시계 얘기는 흘리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전달한 사실도 보도했다.

JTBC 시사프로그램인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2009년 4월22일 KBS의 명품시계 보도가 나오기 직전 국정원 쪽에서 이인규 중수부장을 찾아와 ‘사법외 처리’를 주문했다는 검찰 관계자의 증언을 최근 보도하기도 했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의 폭로가 있기 전에도 국정원이 명품시계 보도의 진원지라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었다. 국정원 개입설을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은 바로 검찰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중수부 폐지 등 책임론에 휩싸인 검찰 내에서 이른바 ‘나쁜 빨대’가 검찰 내부가 아닌 국정원이라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논두렁 시계’라는 네이밍 방식이나, 검찰 쪽 증언의 구체성에 비춰볼 때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 수사과정에서 언론플레이를 벌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인규 중수부장이나 검찰 관계자들의 주장처럼 국정원이 일방적으로 사태를 주도했고 검찰은 국정원의 언론플레이에 “당혹스러웠다”는 내용은 신뢰하기 어렵다.

▲ 2009년 5월13일 SBS 8뉴스 리포트 갈무리
▲ 2009년 5월13일 SBS 8뉴스 리포트 갈무리

이인규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 소환이 있기 한달여전인 3월20일 이례적으로 출입기자들에게 ‘점심식사 번개’를 제안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며 “내·외부 막론하고 수사는 끝까지 간다”고 노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한 암시를 주었다.

실제 4월에 접어들면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긴급체포됐고 노무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의 핵심으로 떠오르게된다. 검찰의 언론플레이는 ‘나쁜 빨대’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명품시계 보도 이틀 전인 4월20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이런 수사 방식은 처음 봤다”며 “검찰이 매일 매일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다시피 하고 있다”고 비판할 정도로 이인규, 홍만표, 우병우 라인의 수사라인은 노 전 대통령을 흠집내기 위한 극심한 언론플레이를 벌이고 있다.

검찰은 노무현 전 통령을 대상으로 한 언론플레이의 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국정원이 주도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책임회피용일 가능성이 있다.

‘논두렁’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SBS의 단독보도를 보면, 해당 기자는 “검찰이 밝혔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일각에서 제기된 의혹처럼 적어도 국정원의 일개 정보관으로부터 들은 얘기라고 보긴 어렵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언론까지) 몇 단계를 거쳐 이뤄졌다“고 표현한 대목을 보더라도 검찰과 무관하게 국정원이 직접 언론사를 상대로 여론조작을 했다기 보다는, 검찰 수사라인을 통해 국정원의 개입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당시 보도를 냈던 SBS 기자는 미디어오늘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국정원감시네트워크)은 “이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한 피의사실 공표죄로 2009년에 (검찰 수사라인을)조사해야 했다”며 “만일 검찰 주장대로 국정원이 언론플레이를 주도했다고 하더라도 보도내용을 부인하지 않고 (국정원의 언론플레이를)방치한 검찰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용 사무처장은 “실체적으로 공표된 내용을 흘린 사람이 국정원이냐, 검찰이냐의 진실 공방이 지금 미궁에 빠져있는데, 당시 언론플레이에 부응했던 언론사나 관련자들이 사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