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민주항쟁은 우리 사회에 많은 변혁을 가져왔다. 양김의 분열로 쿠데타 세력의 수명이 연장되긴 했지만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었다. 언론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 신문과 방송에도 노조 설립의 바람이 불었다.

1987년 12월 군부독재의 나팔수였던 MBC에 공정방송을 기치로 내건 노조가 생겼다. 최초의 방송사 노조였다. 이듬해인 1988년, 노태우 정권은 과거 늘 하던 방식대로 MBC에 낙하산 사장을 연이어 내려 보냈지만 파업을 불사한 MBC노조의 저항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그리고 몇 개월 뒤 MBC노조는 박정희가 강제로 빼앗아 ‘장물’이 되어버린 MBC를 제도적으로 정상화하기 위해 MBC위상정립추진협의회를 발족하고 다시 파업의 배수진을 쳤다. 다행스럽게도 파업 돌입 직전에 방송문화진흥회 특별법이 통과됐고 파업은 철회됐다. 

1988년 12월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는 그런 긴장상황 속에서 태어났다. 방문진이 민주화 투쟁과정의 시대적 산물이며 MBC노조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법조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입법 회의록에 MBC종사자들의 이사 추천 몫을 언급한 것은 방문진 설립에 쏟은 MBC노조의 노력과 향후 역할을 고려한 결과이다. MBC에 두툼한 외피를 입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MBC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방문진은 내년에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방문진 설립 이후에도 공영방송이면서 주식회사인 MBC와 그 MBC의 대주주인 방문진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낯선 구조라는 시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방문진의 존재이유가 부정되거나 법적 지위가 흔들릴 일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방문진 체제 속에서 MBC는 어두웠던 시대의 거짓 역사를 거둬내고 진실을 재조명했다. 불편부당한 보도와 방송의 공정성을 끊임없이 추구했고, 프로그램 곳곳에서 다원적 가치와 다양한 문화적 토양을 일구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공영방송으로 발돋음 하면서 ‘좋은 친구’라는 MBC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방문진의 존재는 필연이었다.

▲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씨. 사진=ⓒ 연합뉴스, 청와대
▲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씨. 사진=ⓒ 연합뉴스, 청와대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MBC는 다시 부패한 권력집단의 홍보도구로 전락했고 조직은 처참하게 붕괴됐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심에 방문진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방문진은 권력의 방송통제를 막아내는 공영방송의 외피는커녕 반민주와 반저널리즘을 획책하고 특정 정파의 주장과 이념을 선전하는 핵심세력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조짐은 이미 ‘사장의 청와대 조인트 사건’이나 방문진 이사들의 부적절한 언행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이사들의 이념 편향적 발언들, 경영진 비리에 대해 관리감독 기구로서 내린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들, 대통령 국정농단이라는 미증유의 범죄행위에 대해 다수이사들이 보여준 위험한 국가관 등은 방문진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MBC 임원들과 방문진 이사들이 부당인사와 노조탄압에 대해 나눈 충격적인 모의행위가 지난 8월16일 방문진속기록을 통해 밝혀지면서 확실해졌다.

방문진 문제의 심각성은 다수이사들의 신념체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논의와 의사결정 방식에서도 민주주의에 반하는 다수의 횡포가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모든 결정이 숫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며 논의는 ‘묻지마 표결’을 위한 형식에 불과할 정도다. 표결의 양상 또한 다수이사 6인의 입장이 단 한 번도 갈린 적이 없고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과거 방문진이 청와대의 의지를 꺾고 시민사회의 원로 언론인을 MBC 사장으로 추대했던 경험이나, 여야 이사들이 뜻을 모아 만장일치로 사장을 선정했던 사례들과 비교할 때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방문진의 이러한 현실은 우선 사람에서 기인하며 정치사회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 토양에 근본 원인이 있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런 미성숙한 정치사회적 토양이 어느날 갑자기 개선될 수 있는 것 또한 분명 아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비리와 패악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은 모두 ‘방송장악’, ‘언론통제’로 몰아가는 적폐세력들의 적반하장을 보면서 법과 제도의 강제성이 절실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방송문화진흥회. 사진=김도연 기자
▲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방송문화진흥회. 사진=김도연 기자
이런 상황에서 방문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영방송지배구조 논의가 재개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권교체로 여야의 입장이 뒤바뀌면서 지난해 야권에서 발의했던 ‘언론장악방지법’ 논의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특히 지난달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 법안을 비판하고, 자유한국당은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를 ‘방송장악 음모’라고 즉각 되받아치고 있는 모습은 방송법이 또 하나의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할 위험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공영방송지배구조 문제는 정치적 개입을 더욱 차단하는 방향으로 논의되어져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과거 입법 기술상의 문제나 법제도의 정합성 문제로 배제됐던 ZDF나 BBC의 지배구조 모델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논의의 테이블에 올라와야 한다. 사회 각 분야나 각 지역의 대표들이 방문진 이사회에 참여하는 방안과 시민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장추천 국민대리인단 등의 방안도 깊이 있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안들이 우리 문화에 생소하고 우리 사회구조에 적용하기 어렵더라도 이제는 진지한 논의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여야 정치권의 입장만으로 방송법을 재단하기는 어려워졌다.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논의할 특별기구가 필요하며 관련 학계와 시민사회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단순히 여야의 힘겨루기에서 벗어나 실질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할 때이다.

▲ 서울 상암동 MBC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 상암동 MBC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첫 번째 조건은 열린 논의구조와 그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시급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법과 제도의 논의 이전에 침몰하고 있는 MBC호를 신속하게 구해내는 일이며, 이를 위해 현 MBC와 방문진에 대한 인적 청산은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의 체제가 하루하루 연장되는 데 따라 무너진 MBC의 복구시간은 10배 20배로 늘어난다. 방문진의 정상화는 하루가 시급하다. 임면권을 가진 규제기구의 신속한 판단과 대책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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