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대통령 부인 존칭 표기를 ‘씨’에서 ‘여사’로 변경했다. 한겨레는 지난 25일 2면에 “독자 여러분의 요구와 질책, 시대의 흐름에 따른 대중의 언어 습관 변화 등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며 “신문사 내부의 토론, 독자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조언 등을 두루 거쳐 1988년 창간 이후 유지해온 표기 원칙을 바꾸기로 했다”고 알렸다.

한겨레의 대통령 부인 존칭 표기 원칙은 ‘씨’였지만 일부 기사에서 ‘여사’로 표현했고, 연합뉴스 전재 기사에도 연합뉴스 원칙에 따라 ‘여사’로 표현된 기사가 한겨레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이에 일부 독자들은 한겨레를 향해 ‘문재인 대통령을 무시한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한겨레는 지난 6월 ‘독자·시민과의 소통확대를 위한 TF’를 꾸리고 ‘독자·시민과의 소통 확대 방안 보고서’를 통해 “한겨레 비판에는 오해도 많지만 크고 작은 제작상 실수가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있다”며 지난 7일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했다. 독자와의 소통에 비중을 두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한겨레 사옥. 사진=차현아 기자
▲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한겨레 사옥. 사진=차현아 기자

한겨레는 25일자 13면에 대통령 부인 존칭과 관련해 전문가들 좌담 요약, 김종구 편집인이 칼럼 형식으로 쓴 ‘좌담회 후기’, 독자 여론조사 결과 등 기사 3개를 통해 존칭을 ‘여사’로 바꾸게 된 경위 등을 보도했다.

김 편집인은 “좌담회 이후 한겨레는 깊은 고민 끝에 대통령 부인 이름 뒤 존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며 “오늘의 변화가 과거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일깨운 소중한 자리였다”고 했다.

한겨레는 지난달 6~7일 여론조사기관(MRCK)에 의뢰해 대통령 부인 존칭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구독자 507명이 참여한 이 조사에서 ‘씨’로 표기한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49.5%, ‘여사’가 적절하다는 응답자는 36.3%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 부인 사례에 대한 표기는 ‘여사가 적절하다’는 응답이 56%로, ‘씨가 적절하다’는 응답 12.6%보다 4배 이상 많았다.

또한 한겨레는 지난 17일 전문가 4명을 불러 대통령 배우자 존칭 관련 좌담회를 진행했고 이를 25일자 지면에 정리했다. 창간 초기 표기법 기초를 닦은 최인호 전 한겨레 교열부장은 “‘영부인’이나 ‘여사’가 권위적인 말이란 반성도 있었다”며 “더구나 신분을 표시해주는 설명이 앞에 붙어 ‘○○○ 대통령 부인 아무개씨’라고 하는데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젠더 관점에서 ‘여사’ 존칭 문제를 접근했다. 강 대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호칭이 또 다른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며 “‘부인’ ‘부군’보다 ‘배우자’라는 표현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처럼, 가치 지향적 언어 사용에는 훨씬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겨레가 창간 때 표방한 탈권위, 탈가부장주의, 차별 표현 지양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이 논란을 계기로 탈권위주의 문화, 성별화된 언어 환경 개선 등 제2의 창간처럼 고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사’를 사용해야한다는 입장인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은 한겨레 좌담회에서 “왜 이 문제가 이렇게 오래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한겨레가 어찌보면 별것 아닌 문제로 일파만파를 만들었다”는 의견을 냈다. 이어 “한겨레의 태도가 고루하다”며 “세상이 바뀌었고 엘리트주의가 다 깨졌다. 권위는 시민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1988년과 달리 씨를 붙이는 표기원칙의 의미가 2017년엔 달라졌다는 뜻이다.

최 전 의원은 문제가 한겨레 태도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겨레 표기 원칙이 무너졌다는 것을 지지자들이 기가 막히게 알고 정서로 치환해 느끼고 있다”며 “청와대에서 (존칭이) 논란이 되니까 정리했는데, 답은 안하고 계속 받아치는 한겨레 대응이 오히려 논란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한겨레가 독자와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김하수 전 연세대 교수는 “80년대 당시 시대와 가장 선진적으로 호흡을 맞춘 것이 한겨레였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그런가”라고 반문했다.

▲ 지난 25일자 한겨레 13면 기사.
▲ 지난 25일자 한겨레 13면 기사.

한겨레 내부에서도 의견 수렴을 했다. 한겨레 기자들에 따르면 내부 여론조사에서 ‘씨’와 ‘여사’ 의견이 팽팽했지만 ‘여사’ 의견이 좀 더 많았다. 무시할 수 없는 소수의견이 있지만 독자와 한겨레 내부 모두 ‘여사’ 의견이 많았다는 점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견이 있지만 회사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사내외 의견을 수렴해 결정했지만 여전히 ‘여론수렴이 충분했다’ ‘충분하지 않았다’ 의견이 갈린다”며 “두 가지 존칭이 각각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할 건지, 지금 기조라면 앞으로도 ‘여사’로 계속 가야하는 건데 또 논란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겨레 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존칭 관련해) 조용하게 입장을 정리해 기사가 나가면 되는데 지면 한 면을 할애한 것은 회사가 다소 과하게 반응한 것 같다”며 “(여사인지 씨인지는)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번 존칭 변경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한겨레 일부 구성원들은 일단 회사가 방침을 정한 만큼 입장 표명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번 논란에 대해 외부 기자들의 시각도 다양하다. 한 주간지 소속 A기자는 미디어오늘에 “여사로 써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비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독자들이 대통령 부인은 ‘씨’라고 칭하는 게 불편하다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인터넷매체 소속 B기자는 미디어오늘에 “여사라는 존칭은 남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기댄 반사적인 존칭인데 이를 독자들이 우기는 것은 좋지 않아 보인다”며 “‘대통령 부인인 김정숙씨’라고 해도 충분한 표현일 것 같다. 독자들이 우긴다고 한겨레가 사과하며 너무 저자세를 보인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지난 5월 한겨레는 ‘여사’ 존칭 논란이 벌어졌을 때 “군부독재 시절 권위주의 의식의 잔재라는 판단”이라며 김정숙‘씨’로 표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 통신사 소속 C기자는 “한글 표기의 올바른 사용은 한겨레만이 고집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며 “이왕 좋은 의미로 논쟁을 시작한 만큼 내부에서 기존의 원칙을 지키며 밀고 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소한 한겨레 기자들이 (한겨레 표기 원칙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데 내부에서조차 원칙을 지키지 않았던 것도 문제”라며 “논쟁거리와 오해만 양산하고 이제와 논란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것 같아 보여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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