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재판이 오는 25일 1심 선고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난 2008년 삼성 특검은 ‘봐주기 수사’, 1·2·3심 선고는 ‘면죄부 판결’이란 평가를 받아온 점에 비춰, 이 사건 선고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난 3개월 간 공판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 본 미디어오늘은 유·무죄 판결만큼 이 재판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미디어오늘은 삼성 1심 재판이 우리 사회에 던진 교훈을 선고 전까지 연속기획으로 다룬다. - 편집자주

※ 싣는 순서

국정농단 주범들의 ‘모르쇠’만 문제였던 게 아니다. 수사기관의 칼 끝을 피해간 일부 고위공직자들은 진상규명 책임 앞에 불성실한 자세로 일관했다. 자신의 소관 업무에 대해서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며 증언을 회피하는 태도가 가장 두드러졌다. 삼성과의 유착 정황이 드러나도 불충분한 해명으로 넘겼다. 증거인멸 시도가 드러난 경우도 있었다.

원칙을 고민한 건 오히려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윗선의 부당한 지시에 업무일지 기록 등을 통해 증거를 남겼다. 적극적인 진술로 수사기관의 진상규명에 도움을 준 직원들도 있었다. 이들의 증언과 증거는 특검 수사에 요긴하게 활용됐다.

▲ 뇌물 제공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뇌물 제공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일지’ 증거남기는 사무관, ‘삼성-청와대’ 고리 끊는 부위원장?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런 대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기관이다. 석동수 당시 공정위 기업집단과 사무관이 작성한 ‘업무일지’는 특검이 삼성 측 부정청탁 현안을 입증하는데 도움이 됐다. 2015년 10~12월 당시 삼성그룹의 현안은 ‘삼성물산 처분 주식수 최소화’였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새로운 순환출자고리가 만들어졌고 이에 그룹 계열사 중 일부가 고리를 끊기 위해 삼성물산 지분을 팔아야 했다. 기업 지배력이 걸린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윗선의 부당 개입 의혹이 일었다. 공정위는 10월14일 기업집단과장·사무처장·부위원장·위원장의 결재를 거쳐 삼성SDI 및 삼성전기가 각각 500만 주 씩 처분해야 한다는 ‘1000만 주 처분안’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김학현 당시 부위원장의 지시로 11월18일 돌연 재검토에 들어갔다. 김 전 부위원장이 김종중 전 미래전략실 사장을 만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결국 공정위 전원회의에 부쳐진 이 건은 12월16일 ‘900만 주’ 처분으로 정리됐다. 부위원장은 12월22일 또다시 결정을 번복했다. 다음날 공정위는 ‘500만 주 처분안’을 최종 승인·결정했다. 500만 주 안은 삼성 측이 일관되게 요구했던 안이었다.

석 사무관은 11월 중순 부위원장의 결정 번복에 의아함을 품고 이 사안과 관련한 업무일지를 작성했다. 김정기 당시 기업집단과장의 지시였다. 누구를 언제 어디서 왜 만났는지, 위원장·부위원장 등의 지시 내용, 청와대 자료 송부 여부 등이 기록돼있다. 법정 증인으로 출석한 석 사무관과 김 과장은 당시 김학현 부위원장과 정재찬 위원장에게 논의 현황을 구두와 서면으로 지속적으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두 간부는 이들 보고 대부분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일관했다. 특히 10월14일 직접 보고서를 검토한 후 결재한 ‘1000만 주 처분’ 안에 대해, 정 전 위원장은 “저 업무를 한 번도 담당해본 적 없어 내용을 알고 사인한 게 아니”라고 증언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결재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난다” “당시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특검은 지난 6월2일 법정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이슈 및 입장 검토' 보고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민원에 대한 공정위 회신안 △10월14일 결재안 요약 보고서 △11월4일자 삼성 순환출자 관련 대응방향 문건 △11월20일자 삼성 순환출자 관련 대응방향 문건 △11월26일 삼성 순환출자 관련 쟁점 검토 등 정 전 위원장이 보고받은 문건을 열거했다. 그는 모든 문건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결정은 왜 바뀌었을까. 김 전 부위원장은 결정에 오류가 있어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는 한편, 김 전 부위원장은 결정이 번복될 때마다 김종중 전 사장, 최상목 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현 기획재정부 1차관)과 집중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김종중 사장에게 공정위 논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문자로 알려주기도 했다.

특검 측은 통화·문자내역을 제시하며 ‘현안 청탁을 받은 게 아니냐’고 추궁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통화 내용이 기억이 안난다” “(최 전 비서관과는) 순환출자고리 건의 통화는 아니었다” 등의 답을 내놨다. 500만 주 처분안이 최종 결정되기 하루 전인 12월22일 최 전 비서관과 아홉 차례 연락을 주고 받은 것에 대해서도 김 전 부위원장은 “의미가 없는 통화 아니었나 싶다. 무슨 통화를 그렇게 했는지…”라고 해명했다.

최 전 비서관은 “청와대가 어떤 지시나 역할을 하지 않았다”며 이에 부응했다. 최 전 비서관은 김 전 부위원장과 연락을 주고 받은 것에 대해 “경제민주화 이슈나 법안 관련 내용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 현안을 챙긴 것도 “누구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언론 매체, 친구들 이야기 등을 통해 스스로 판단한 것”이라 강조했다.

김 전 부위원장의 모르쇠는 계속 됐다. 김 전 부위원장은 석 사무관 등에게 삼성 측 법률대리인과 논의해보라고 수회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김 전 부위원장은 법률대리인이 준 삼성 측 입장 문건 6건에 대해서는 “내용이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 김학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민중의소리
▲ 김학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민중의소리

이 같은 모르쇠 진술은 청와대와 삼성 현안 간 연결 고리를 끊는 진술로 읽힐 수 있다. 특검은 위원장 결재까지 완료된 처분안이 이례적인 번복 과정을 거쳐 삼성 측 요구대로 결정된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입장이다. ‘500만 주 처분안’ 요구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최상목 전 비서관→김학현 전 부위원장’ 순으로 전달됐다는 취지다.

안 전 수석은 이 과정에서 최 전 비서관에게 ‘두 안이 모두 가능하면 500만 주가 좋겠다’고 말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특검에서 “최 전 비서관이 ‘안종범이 2안(500만 주)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에 역정을 낸다. 형님 의견이 2안이니 위원장 2안 결정하도록 설득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안 전 수석, 최 전 비서관, 김 전 부위원장은 이후 법정에서 이 진술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부인했다.

떳떳하다는 공정위 간부, 휴대폰은 은폐했다

대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면 당사자가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 한 진상은 규명하기 쉽지 않다. 말 맞추기 진술, 허위 진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 맞추기 진술은 이번 특검에서 확인된 사례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그룹 관계자 전원은 지난해 검찰 수사에서 ‘2015년 7월24일’ 두번째 대통령 독대 사실을 숨겼다. 그러다 특검 수사 개시 후 사실을 고백했다.

삼성그룹 현안과 관련된 고위공직자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삼성물산 주식 처분 건’의 경우에도 관련 고위공무원들은 “청와대의 개입이 없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례적인 결정 번복 △실무자 층의 반발 △삼성(김종중)-공정위(김학현)-청와대(최상목) 간 통화내역 △안종범 전 정책수석 ‘500만 주’ 발언 등을 고려하면 의혹 제기는 쉽게 거두기 힘들어 보인다.

청와대 개입을 철저히 부인하는 최상목 전 비서관은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 깊숙이 연루된 인물이다. 최 전 비서관은 안종범 전 수석의 지시에 따라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논의를 주도했다. 그는 미르재단 설립을 위해 2015년 10월 네 차례 열린 청와대 회의를 주재했다. 경제수석실 행정관에게 삼성물산 합병 및 엘리엇 매니지먼트 분쟁 사태 등을 챙겨 보라고 지시했다. 각 행정관들로부터 대통령과 기업 총수 독대 시 작성된 ‘대통령 말씀자료’도 보고받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증거인멸 의혹을 사기도 했다. 그는 특검 조사 초기에 “휴대폰을 버렸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마음을 바꾼 그는 이후 휴대폰을 특검에 제출하며 “로펌 변호사들이 핸드폰을 무조건 버리라 수차례 말했다”며 “몇 번을 망설이다 버리진 못하고 유심칩은 꺼내 버리고 나머지는 집에 가져와 아들의 차 뒷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고 진술서를 썼다.

▲ 최순실과 공모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 소리
▲ 최순실과 공모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 소리

“삼성만 청와대에 기업 현안 말 안해줬다”는 청와대 행정관

대통령에게 보고할 말씀자료를 “인터넷을 보고 작성했다”는 행정관도 있다. 윤인대 전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은 삼성그룹 관련 대통령 말씀자료와 관련해 진실 은폐 의혹을 사고 있다. 그는 말씀자료를 작성할 때 삼성그룹에 한해서만 ‘기업 건의사항 및 애로사항’을 직접 전해 듣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제출된 자료가 미비한 것을 두고 LG측엔 독촉을 했지만 삼성 측엔 하지 않았다. 두번째 독대가 있었던 2015년 7월, 윤 행정관은 말씀자료 작성에 참고한 삼성 자료에 대해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그때도 별다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역시 삼성은 아무 내용이 없구나 내가 알아서 작성해야겠구나’ 그랬기 때문에 잘 기억이 안난다”고 말했다. 동시에 LG그룹 대관담당자에겐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독촉해 자료를 제출받았다.

윤 행정관은 삼성 측이 기업 건의사항을 전달해주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말씀자료 쓸 때 삼성이 제일 힘들었다” “다른 그룹은 현황이든 내용을 담아 오는데 삼성은 신경 안쓰는 거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 행정관의 진술은 동일한 업무를 한 다른 행정관의 진술과 배치된다. SK 등 기업 말씀자료를 작성한 방기선 행정관은 각 기업 대관 담당 임원이 보내준 현황 자료를 확인해서 말씀자료를 작성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방 행정관은 ‘삼성그룹 관련 말씀자료 때도 대관담당 임원에게 현황자료 보내달래서 내용을 채웠다’고 법정에서 확인했다.

윤 행정관은 ‘메르스 사태’,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삼성물산 합병’ 등 말씀자료에 나온 삼성 현안의 경우 본인이 인터넷과 언론 등에서 보고 적은 내용이라 밝혔다. 아울러 그는 삼성 측에서 받은 자료가 없다고 강조했다. 윤 행정관은 ‘대통령이 누구에게 확인했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이냐’는 특검 측 질문에 “사람이니까 실수를 한다”며 “그렇게 물어보면 인터넷보고 썼다고 하고, 뭐라고 하면 죄송하다고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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