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4월 이전 KBS에 입사한 PD 63명이 18일 고대영 KBS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후배들의 방송 정상화 투쟁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1990년 4월 KBS 언론인들은 노태우 정권의 낙하산 사장 임명에 반대하며 36일 동안 파업에 돌입했다. 18일 성명을 낸 KBS 고참 PD들은 이른바 ‘KBS 4월 투쟁’에 동참했던 인물들이다.

63명의 KBS PD들은 “작금의 상황은 1990년 4월을 떠오르게 한다”며 “그해 우리는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지켜오던 사장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교체하려는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의도에 맞서 36일간 싸웠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통폐합된 구성원들의 이질성을 고려하면 KBS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들은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 라는 당시의 구호가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민주화가 역행하리라 경계하지 않았던 안이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듯 보이던 줄 세우기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자리 사냥꾼’들이 미끼를 무는 사이 공영방송의 책임은 그저 허망한 말로만 남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엔 내정된 자리에 허울뿐인 공모를 하고, 내외부의 청탁에 휘둘리며 무조건적인 복종을 담보로 한 ‘자리 나누기’가 노골적인 행태로 나타났다”며 “공영방송 역할을 무시한 KBS는 이제 존재마저 시청자들에게서 지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KBS PD들은 이어 “늦었지만 촛불의 명령에 앞장설 것”이라며 “공영방송 KBS 역할을 되찾으라고 국민은 명령하고 있다. 이 기회를 수포로 돌릴 수는 없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 고대영 KBS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 고대영 KBS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그러면서 이들은 △고대영 체제를 옹호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 △명령 불복종이든 제작 거부든 가능한 모든 투쟁을 후배들과 함께 할 것 △반개혁 세력을 끝까지 가려내 응징할 것 △KBS가 공영방송 역할을 되찾는 그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 등을 선언했다.

고대영 KBS 사장이 임명한 PD 출신 본부장들을 지난 16일 KBS PD협회가 협회원에서 제명하는 등 최근 KBS PD들의 ‘고대영 체제’ 거부 운동은 거세지고 있다.

KBS 기자협회도 지난 16일 오후 기자총회를 열고 고 사장의 즉각적인 퇴진과 잡포스팅 거부, 제작 중단 등을 결의했다. 이보다 앞서 전국의 KBS 기자 516명은 “기자들이 앞장서서 고대영 체제를 끝내겠다”며 제작 중단 결의 성명을 발표했다.

아래는 1990년 4월 KBS 민주항쟁 참여 PD들의 성명 전문이다.

[KBS 개혁을 막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분노와 열망이 담긴 글들이 코비스를 달구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시작된 변화의 물결이 어느새 KBS 처마 밑에서 넘실대고 있습니다. 이 도도한 흐름을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곡된 체제를 존속시키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부당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세력들이 여전히 반성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1990년 4월을 떠오르게 합니다.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지켜오던 사장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교체하려는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의도에 맞서 36일간 싸웠던 일 말입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통폐합 된 구성원들의 이질성을 고려하면 KBS 최초의 대단한 투쟁이었습니다. 그 시절 일정 정도 독립성과 이를 지키려는 90년 4월 방송민주화 투쟁이 87년 6월 민주대항쟁이 준 과실이라면, 이번은 광장의 촛불시민들이 만들어 준 선물이라고 할까요.

90년 방송민주화 투쟁은 사장 교체로 막을 내렸지만 이로부터 KBS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아마 더 많은 구성원들이 KBS의 역할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제작 자율성과 의사결정의 민주화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독립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었고,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 라는 당시의 구호가 언젠가는 실현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민주화가 역행하리라 경계하지 않았던 안이함 때문인지 모릅니다. KBS독립을 담보하는 제도적 보완을 이뤄내지 못한 나태함 탓인지도 모릅니다. 직업윤리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얕잡아 본 문제일 수도 있겠지요.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듯 보이던 줄 세우기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자리 사냥꾼들이 미끼를 무는 사이 공영방송의 책임은 그저 허망한 말로만 남았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엔 내정된 자리에 허울뿐인 공모를 하고, 내외부의 청탁에 휘둘리며 무조건적인 복종을 담보로 한 자리 나누기가 노골적인 행태로 나타났습니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무시한 KBS는 이제 존재마저 시청자들에게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KBS 구성원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렇습니다.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든, 얄팍한 당근에 현혹되었든, 소극적 저항에 만족했든, 인간관계 때문에 뿌리치지 못했든,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유를 적극적으로 지켜내지 못했으니까요.

늦었지만 촛불의 명령에 앞장서겠습니다. 촛불은 명령합니다, 공영방송 KBS의 역할을 되찾으라고. 늘 주인이었던 시청자, 국민들의 명령입니다. 선물을 받았습니다.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 기회를 수포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저희에게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앞잡이들이 계속 설치게 놔둘 순 없습니다. 가슴깊이 묻어 두었던 분노를 담아 다음과 같이 투쟁할 것을 선언합니다.

하나. 우리는 고대영 체제를 옹호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우리는 명령불복종이든 제작거부든 가능한 모든 투쟁을 후배들과 함께 할 것이다.
하나. 우리는 반개혁 세력을 끝까지 가려내어 응징할 것이다.
하나. 우리는 KBS가 공영방송의 역할을 되찾는 그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1990년 4월 KBS 민주항쟁 참여PD 일동(63명)
강대택 강민부 강영원 경기수 공용철 곽삼수 곽한범 구중회 국순엽 국은주 김광호 김기표 김덕재 김동훈 김명우 김무관 김영묵 김영한 김영환 김인호 김창범 김학순 나혜경 류호석 문정근 민승식 박상조 박일성 박정옥 박형로 방성룡 설상환 성수일 소상윤 송대원 심상구 안정균 양승동 연규완 오강선 우종택 윤한용 어수선 은희각 이강택 이금보 이도경 이만천 이상운 이상출 이석진 이완희 이용우 이은미 임혜선 장영주 장충순 정동희 최공섭 최태엽 허태원 홍성협 황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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