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났네. 이거 완전히 조작품이고 얘네들이 훔쳐서 했다는 걸로 몰아야 돼.”  최순실씨의 육성이 담긴 통화 녹음기록이 수사에서 주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지난 총선 때 친박의원들의 공천 개입, 청와대의 KBS 세월호 보도개입도 통화녹음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 이언주 국민의당 의원의 급식노동자 폄하 발언, 김학철 충북도 의원의 ‘레밍’발언 역시 기자와 통화에서 나온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과 통화하는 도중 “상대방이 녹음버튼을 클릭했습니다”라는 알림이 간다면? 범죄 또는 정치인의 부적절한 언행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핸드폰 통화 녹음을 하면 상대방에게 알림이 가도록 하는 법안을 지난달 발의한 가운데 역효과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달 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전기통신사업자는 이용자가 통화내용을 녹음하는 경우 그 사실을 통화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골자다.

사단법인 오픈넷은 14일 성명을 내고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입법 취지의 측면, 현실적 부작용의 측면,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한 함의의 측면에서 모두 심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 드라마 '비밀의 숲' 화면 갈무리. 극 중 인물 이창준은 핸드폰 녹음을 통해 비리를 폭로한다.
▲ 드라마 '비밀의 숲' 화면 갈무리. 극 중 인물 이창준은 핸드폰 녹음을 통해 비리를 폭로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내부고발 등 부조리를 밝히는 것을 봉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픈넷은 “개정안은 대화 당사자의 녹음할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 부조리를 밝히고 범죄를 드러내는 과정, 특히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 그리고 약자가 강자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에 근본적인 장애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김광림 의원 측은 미국에서는 27개 주에서 상대방 동의 없는 통화녹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발의 근거로 강조했지만 과장됐다는 반론도 있다. 오픈넷은 “미국 50개 주 중에서 대화 당사자 모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주는 12개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 중에는 필요에 따라 상대방의 동의 없는 녹음을 허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는 대화 내용이 범죄 사실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녹음을 허용한다.

기존 통신비밀보호법은 물론 판례가 이 법안의 취지와 상충되는 문제도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당사자 간 녹음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1997년 대법원은 “피고인이 범행 후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오자 피해자가 증거를 수집하려고 전화내용을 녹음한 경우 모르게 녹음된 것이라 하여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2006년 대법원 역시 “(대화를 나눈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대화를 녹음하는 경우 녹음행위가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배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따라서 관련 기준에 대한 논의를 하려면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통해 사업자에 ‘알림 의무’를 부과하는 식의 우회로를 찾을 게 아니라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관련 논의를 하는 게 정상적이다.

오픈넷은 자유한국당 의원 8명과 통화를 통한 세월호 보도개입 당사자인 무소속 이정현 의원이 공동으로 이 법안을 발의한 점을 언급하며 “국정농단 사태에서 통화 녹음을 비롯한 여러 디지털 증거물들로 인해 뜨거운 맛을 본 세력이 이제 그러한 일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