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에 있었던 추적60분 스튜디오 녹화 날이었다. 삼성물산 합병 건에 대한 국민연금의 이상한 결정에 대해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와 야당 인사가 분석토크를 하는 자리, 당일 아침 야당 의원은 촬영을 거부하였다. 간곡한 설득 끝에 마음을 돌려준 패널과 녹화를 무사히 마치고 나서 그 의원은 한마디 남겼다. ‘어디 KBS에서 내 멘트가 나갈 수 있겠어요?’

웃으며 넘겼던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현실이 되었다. 야당 의원만 토크에 나오는 것은 공정하지 않으니 토크를 프로그램에 쓰지 말라는 상부의 결정이 있었다. 출연자에 대한 엄청난 죄송함과 함께 내가 그때 뼈저리게 느낀 건 ‘아 이래서 위에서 싫어하는 사람은 쓰지 말라는 거구나’였다.

▲ 7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오태훈 부위원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7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오태훈 부위원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KBS의 블랙리스트, 그것은 무형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KBS 구성원 마음속에는 블랙리스트가 있다. 정권이 불편해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 존재 자체로 정권이 불편해 하는 인사들을 섭외하게 되면 여지없이 사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심지어는 정권이 원치 않는 팩트-통계나 여론조사-를 담아내는 것조차 가끔은 윗사람들을 자극하기도 하는데, 내가 처음 입사한 2012년, 대선에서 처음으로 안철수 후보가 박근혜 후보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얻는 통계가 나오자 이례적으로 당시 본부장까지 제작편집실에 들어와 자막을 작게 하라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이 회사는 ‘공정’하다. 강자들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권력에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에게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시청자 앞에 설 기회조차 빼앗는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시의성 있는 문제들은 프로그램 아이템으로 선택되지 못했다. 한일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논란, 세월호 3주기, 백남기 농민 사망 등 굵직한 사회 이슈들은 문제제기를 해야 할 제 시기를 항상 놓쳤다. 취재 허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시작부터 ‘센 거’ 있는지 ‘새 거’있는지, ‘공정’한지 질문 받았다. 그 결과 프로그램 아이템은 자극적인 사건·사고형 아이템으로 가득 채워졌다. 거대 악에 눈감고 소악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고 신뢰를 잃었다. 

공정한 시사프로그램을 항상 강조하던 한 간부는 후배 PD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프로그램 만들 때 이 세 가지만 기억해. 눈물, 공분, 응징.” 선악이 분명한 형사사건, 누군가의 악행으로 삶이 시각적으로 엉망이 된 피해자가 존재하는 프로그램만이 그에게는 공정한 시사프로그램이었다. 사건과 사회이슈라는 두 바퀴로 달려야할 시사 프로그램은 한쪽 바퀴를 떼고 달리는 외발 자전거가 되었다.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KBS라서 입는 불이익은 어마어마했다. 내부에서 어떻게 해서는 아이템을 밀어붙여 방송을 해보려고 한 아이템, 밖에 나가봤자 시청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야말로 ‘수신료 강도’라 불렸고 일하는 사람들은 KBS를 불신했다. 억울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 방송이 진지하게 담아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팟캐스트에는 출연해도 KBS에 출연하지 않는 패널들이 늘어갔다.

▲ 고대영 KBS사장. 사진=노컷뉴스
▲ 고대영 KBS사장. 사진=노컷뉴스
이 방송국의 신뢰도가 땅을 치는 동안 고대영 사장은 방만한 KBS를 개선한다며 3대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조직개편과 잡포스팅, 관리회계 등 일련의 개혁들이 회사를 휩쓸었다. 프로그램도 노조활동도 열정적으로 했던 한 선배는 잡포스팅 제도 덕에 연수원에서 ‘저성과자 관리 프로그램’ 대상자가 될 상황에 처했다. 관리회계로 사내 자산도 비용 처리되어, 사내 정규직 카메라맨을 쓰게 되면 높은 제작비를 감당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려 하고 있다. 조직개편 때문에 간부 자리는 늘었지만 국간 장벽이 생겨서 인력 이동은 어려워졌다.

무너진 KBS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는 지금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다. 개인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상사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던 제작자들, 살아있는 촛불의 이야기를 담으려는 PD, 부당한 리포트를 거부하고 지방 발령을 감당한 기자 등 크고 작은 희생들이 KBS 내부에서 계속되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요구한 사장 퇴진은 작은 함성이었으나 유례없는 대규모 촛불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선명해 지고 있다. 권력을 사유화했던 지난 정권과 손발을 맞추어 오던 그 사람들을 구성원들은 기억한다.

▲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사진=정철운 기자
▲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사진=정철운 기자
▲ 조나은 KBS PD
▲ 조나은 KBS PD
국민이 수신료를 내는 공영방송에 바라는 것은 어떤 권력도 견제하는 항상성이다. 보수정권이건 진보정권이건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어주었다면 시청자들은 KBS를 여전히 신뢰했을 것이다. 현 수상을 희화화 하는 시트콤 ‘YES MINISTER’, 메이 총리를 꾸짖는 BBC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저 정도는 돼야 국민들이 수신료의 가치를 아까워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양한 플랫폼이 개발되고 수많은 언론이 등장한 오늘날의 언론 지형에서 굳이 KBS가 존재하는 이유를 곱씹어 본다면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첫걸음은 바로 현 경영진의 퇴진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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