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철저한 고증을 거친 실화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제 성격을 명확히 규정한다. 이준익 감독과 배우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가 ‘박열’을 공부했다. 이 감독은 지금껏 자신이 절대 권력에 대책 없이 반항하고 저항하는 캐릭터를 그려왔다고 자평했다. 전작 ‘왕의 남자’의 장생이 그랬고, ‘사도’의 사도세자가 그랬다. 이준익은 20년 전부터 ‘취향저격 캐릭터’ 박열을 기획해왔고 마침내 그 열정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런데 관객들은 의아하다. 그 시대를 다룬 영화들이 모두 그러하듯, 일본은 나쁘고 조선은 핍박받는 캐릭터로 투영하는 프레임이 ‘박열’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인물 박열 자체가 독립운동가가 아닌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 영화 '박열' 포스터.
▲ 영화 '박열' 포스터.
영화 속 박열은 일본 권력층은 증오하지만 오히려 일본 민중에겐 동질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내러티브도 민족해방을 위해 운동하기보단, 일본의 천황체제를 타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전개된다. 무정부주의를 뜻하는 아나키즘 자체가 우리 대중문화에선 크게 다뤄진 바가 없어 더욱 낯설다. 박열이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칭하는 장면도 중반부가 넘어서야 등장한다.

이준익 감독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를 획일적으로 보는 프레임은 저급하고 단세포적이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믿어야 왠지 극적인 것 같고 편하니까 그런 프레임을 짜는 것이다. 그럼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은 다 나쁜가. 역사를 바로 잡으려면 진실을 진실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관객은 그를, 그 시대를 이해하려 애쓴다. ‘암살’, ‘밀정’, ‘덕혜옹주’ 등 동시대를 다룬 타 작품의 프레임과 결을 달리 하는 데다, 이준익 작품 특유의 연극적 뉘앙스도 소화해야 하기 때문. 그렇게 극 중 대표적 악인으로 보여지는 일본 내무장관이 체제의 합리성을 추구하려다 맥을 못 추고, 일본인 법관들이 조선인 박열에 동화되는 한편, 박열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작전을 계획하는 서툴고 낯선, 그렇지만 묘하게 통쾌한 1930년대 모습들이 나열된다.

문제는 중후반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칭한 박열이 그동안 우리가 흔히 봐오던 독립운동가적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부터다.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던 아나키스트 박열은 조선 의복을 입고 법정에 등장하고, 고향이 그립다 울부짖는다. 감독은 고증에 철저하고자 실제 박열의 행동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일 테지만, 후반부 인물의 정의가 모호해지며, ‘낯선’ 영화는 ‘의아한’ 영화가 된다. 감독의 말대로 ‘절대 권력에 대책 없이 반항하는 아나키스트’가 어디선가 많이 봤던 민족주의자로 비춰지는 데에 아쉬움이 든다.

박열의 인물성을 강조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등장하는 복잡한 법정싸움과 지지부진한 일본 내각의 회의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장면들도 답답하게 느껴진다. 극 초반,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이 묘사되며 꽤 큰 비중을 차지하던 조선인 운동가와 그의 애인쯤으로 등장하는 일본 여인의 행방이 모호한 점도 아쉽다.

박열이라는 인물을 몰랐던 관객이라면, 포털사이트에 검색이라도 한번 해보지 않고 상영관에 앉았다면, 아마 극 중반부턴 이해를 포기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박열이라는 인물이 가진 메시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돼 버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위의 요소들은 감독 이준익이 갖는 ‘섬세함’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지루할지도 모를 관객을 위해 배치한 듯한 재치 있는 대사들도 성과가 좋다. 아마 그가 꾸리고 주문했을 미장센의 고증이나 배우들의 연기도 완성도 높다. 특히 박열의 배우자이자 일본인 아나키스트로 등장하는 ‘가네코 후미코’ 역의 ‘최희서’의 열연이 눈에 띈다. 낯선 배우로 캐스팅 한 점이 더욱 몰입도를 높인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세상에 선보였다는 ‘박열’. 냉정하게 팩트 만으로 울림을 전하려다, 부과된 열정이 결을 상하게 한 것일지, 영화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을지, 판단의 몫은 관객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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