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나의 가정이지만 아마 코웃음을 칠 것이다. 광주시민을 학살하며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당사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지금까지 항변하고 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다.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전두환 회고록’까지 출간, 5·18 기념재단과 5월 단체들이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기하기도 했다. 전두환씨와 인권·민주주의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단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이런 식의 ‘비상식적 상황들’이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다. 좀 거칠게 말하면 전두환씨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자유한국당 방송장악저지 투쟁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방송장악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하고 있다”며 고대영 KBS사장과 김장겸 MBC사장 사수 방침을 선언했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방송장악과 언론자유 침해를 일삼으며 한국 언론을 후퇴시킨 당사자들이 누구였던가. 자유한국당과 그 전신인 새누리당·한나라당 아니었던가.

▲ 고대영 KBS 사장(왼쪽)과 김장겸 MBC 사장. 사진=ⓒ 연합뉴스, 이치열 기자
▲ 고대영 KBS 사장(왼쪽)과 김장겸 MBC 사장. 사진=ⓒ 연합뉴스, 이치열 기자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이정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 비판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압박한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지난 2011년 KBS가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도청했다는 의혹도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에 저항하다 해직된 언론인들은 아직 현업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명박근혜 정권 기간 동안 발생한 언론침해·탄압 사례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랬던’ 그들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갑자기 ‘언론자유 수호신’ 행세를 하고 있다.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최소한의 반성과 사과도 없는 정치인들의 이 같은 행태를 보는 건 정말 씁쓸한 일이다.

KBS와 MBC 경영진의 행태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KBS 양대 노조와 10개 협회가 최근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88%가 고대영 사장 퇴진, 90%가 이인호 KBS이사장 퇴진을 요구했다. KBS 구성원들은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 하락’을 퇴진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어이없는 건 KBS 경영진의 반응이다. 이들은 12일 공식입장을 내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이 바뀐다면 방송법에서 정한 3년 임기는 무의미한 것이며, KBS를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는 근간이 무력화 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 하에서 방송의 공정성과 공영방송 자율성을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내놓을 입장은 아닌 것 같다. 2008년 당시 정연주 KBS사장이 경찰력까지 동원한 정권의 부당한 압력으로 ‘강제퇴진’ 당했을 때 현재 KBS 경영진은 어떤 태도를 보였나. 자유한국당이 ‘언론자유’를 말하는 것만큼 KBS 경영진이 ‘KBS 독립’을 강조하는 게 염치없는 행동이라 여기는 이유다.

MBC 역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MBC는 최근 메인뉴스에서 “여당 고위 당직자가 공영방송 사장 사퇴를 직접 압박하고 나섰다”며 정부여당을 맹비난했다. 해당 리포트엔 ‘방송장악의도’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정권교체 한 달 만에 공영방송사 경영진 교체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언론 통폐합을 앞세워 언론을 장악했던 5공 군사정권과 닮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날을 세우기도 했다.

▲ 지난 6월7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 지난 6월7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자사 보도의 문제점과 경영진 행태를 비판하는 구성원들에 대해 끊임없는 보복성 징계를 휘두르며 언론탄압을 일삼았던 MBC가 난데없이 ‘5공 언론통폐합’까지 언급하며 언론자유를 외치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KBS·MBC 경영진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지난 과오에 대해 최소한의 자기반성이 없다는 점이다. KBS·MBC 경영진은 이제라도 퇴행적인 ‘언론자유 쇼’를 멈추고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 단언컨대 두 방송사 경영진과 언론자유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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