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주식 처분 최소화 문제' 관련 청와대 측 지시 정황을 알고 있는 것으로 지목된 정재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이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구체적 내용을 모른다"며 무책임한 진술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삼성에 유리한 해석을 최종승인한 것에 대해 청와대 측의 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

정 위원장은 지난 2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제23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2015년 10월부터 12월까지 공정위가 집중 검토한 '삼성그룹 신규순환출자고리 해소' 논의 과정에 대해 증언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 ⓒ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 ⓒ민중의소리

삼성물산 주식 처분 최소화 문제는 당시 삼성그룹의 중요 현안이었다. 삼성그룹은 2015년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으로 공정거래법이 금지하는 계열사 간 신규 순환출자고리가 형성돼 주식 처분으로 신규 고리를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지분은 곧 기업 지배력에 직결되는 바, 삼성 측은 처분 규모를 최소화한 '삼성SDI의 삼성물산 주식 500만 주 처분안'을 공정위 측에 요구했다.

공정위는 2015년 10월14일 삼성SDI 및 삼성전기가 각각 500만 주 씩 삼성물산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는 '1000만 주 처분안'을 최종 결정해 삼성 측에 비공식 통보한 바 있다. 이는 2개월 후인 12월21일 경 급작스런 재검토 과정을 거쳐 '900만 주'로 변경됐다. 이틀 후 이는 또다시 급변해 '500만 주 처분'으로 최종 결정됐다.

정 위원장은 해당 2개월 간의 공정위 논의 과정에 대해 대부분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특히 그는 공정위가 애초 내부 방침을 정한 10월14일 결재문건에 대해서 "저(순환출자고리 관련) 업무를 한 번도 담당해본 적 없어 내용을 알고 사인했다기보다 신아무개 사무처장과 김학현 부위원장이 결재를 했기 때문에 간부들 믿고 싸인을 한 것"이라며 "내용은 잘 몰랐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1990년 경 공정위가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독립되기 전부터 공정위에서 일해 현재까지 공정위에 몸담고 있다. 해당 사안을 직접 담당해 여러 차례 문건을 작성·보고한 석아무개 당시 사무관은 지난 24일 증인신문에서 "위원장은 보고서를 꼼꼼히 읽는 편이고 당시에도 시간을 들여 읽었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공정위 기업집단과 실무자의 대부분의 구두 및 서면 보고에 대해서도 "보고받은 사실, 보고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일관했다.

그는 당시 석아무개 사무관이 2015년 6월 보고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이슈 및 입장 검토' 보고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민원에 대한 공정위 회신안 △10월14일 결재안 요약 보고서 △11월4일자 삼성 순환출자 관련 대응방향 문건 △11월20일자 삼성 순환출자 관련 대응방향 문건 △11월26일 삼성 순환출자 관련 쟁점 검토 등 다수 보고서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증인으로 나온 실무자가 보고했다고 밝힌 건에 대해서는 "담당자가 보고했다면 보고했겠죠"라고 답했다. 그외 다수 '구두보고'에 대해 그는 "구두보고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당시 이 건과 관련해 청와대 경제수석실 인민호 행정관에 논의 사항을 일일이 문건으로 보고하는 등 긴밀히 소통했다. 곽세붕 경쟁정책국장은 지난 25일 증인신문에서 '청와대 지시가 있건 없건 중요 사항은 청와대에 보고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중요한 사항은 청와대에 보고한다"며 "이 사안은 중요한 사항"이라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당시 주요 논의 쟁점 내용과 그에 대한 실무자의 입장도 알지 못했느냐는 특검 측 질문에 "내용을 몰랐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삼성-청와대-공정위, 최종 결재 3일 전부터 무슨 대화했나

'500만 주 처분안'은 공정위 내 전원회의를 거치고 청와대 비서관 보고까지 완료된 '900만 주 처분안'을 이틀 만에 뒤집고 12월23일 결정됐다. 기업집단과 과장·사무관, 경쟁정책국장 등 담당자들은 마지막 날까지 공정위 위원장·부위원장에게 결정 번복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달했다.

특검은 이와 관련 각종 통화내역, 문자메시지 내용, 관계자 간 만남일정 등을 근거로 청와대 측의 '500만 주 처분' 결정 지시가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12월19일 인민호 행정관은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삼성 측 법률대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황아무개 변호사와 박아무개씨 만났다. 박씨는 공정위 과장 출신으로 퇴직 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고용됐다.

석 사무관은 900만 주 처분안을 청와대에 보고한 12월21일 '(최상목 경제금융) 비서관에까지 보고 완료했고 위원장 결심 받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관련 업무 일지에 기록했다. 석 사무관은 21일 일지에 정 위원장이 기업집단과장을 오전, 오후 각 1시간 30분씩 호출했다는 내용도 기록했다.

500만 주 처분안을 주장한 김학현 공정위 부위원장은 같은 날 최상목 비서관과 전화로 '신규 출자 고리를 강화로 본 500만 주 처분과 형성으로 본 900만 주 처분 중 무엇이 맞느냐'는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500만 주 처분으로 결정을 바꾼 것에 대해 "갑자기 바꾼 게 아니라 고민을 계속 하고 있었다. 최 비서관과 통화 후 500만 주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12월22일 김 부위원장은 '900만 주 처분안'만 적혀 있는 최종 결재 문건을 들고 온 석 사무관에게 '500만 주 처분안'을 추가 작성하라고 지시한 뒤 위원장의 최종 결정에 따를 것을 지시했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 디자인=이우림 기자

김 부위원장은 같은 날 최 비서관과 9회 전화·문자 연락을 했다. 김 부위원장은 22일 '2안 추가' 지시를 한 뒤 기록된 최 비서관과의 통화에 대해 "통화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면서 "(기억이 안나는 이유는) 의미가 없는 통화가 아니었나 싶다. 무슨 통화를 그렇게 했는지…"라고 법정에서 말했다.

정 위원장은 22일 퇴근 시간 경 석 사무관 등 실무자로부터 '500만 주 처분안'이 추가된 결재문서를 받았다. 정 위원장은 '오전회의 전에 다시 보자'며 결재하지 않았다.

김 부위원장은 22일 저녁 최 비서관으로부터 '위원장이 빨리 결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안종범 정책수석이 역정을 낸다. 형님 의견이 2안이니 위원장이 2안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잘 설득해달라'는 부탁 전화를 받았다.

김 부위원장은 이후 정 위원장에 전화해 '안 수석이 불쾌해하니 빨리 결정해야한다. 2안이 더 합리적이다.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김 부위원장은 정 위원장이 "부위원장의 말 다 이해한다. 그런데 1안이라고 했다가 2안을 한다면 오해받을 수 있다. 세상에 비밀 없다'며 '2안인 완화된 결정을 할 경우 상당한 비판을 들을 수 있다. 더 고민해보겠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특검 조사에서 밝혔다.

정재찬 '위증' 의혹… 12월23일, 무슨 일 있었나

정 위원장은 어떤 청와대 관계자로부터도 500만 주 처분안인 '2안' 언급을 들은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정 위원장은 22일 김 부위원장과의 통화에 대해 "전화통화를 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김 부위원장이 거짓 증언을 했다는 취지로 청와대 측 의중을 전달받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는 법정에서 "안 수석이 화를 냈다고 말했다면 내가 오히려 화를 냈을 거다. 경제수석은 차관급이고 위원장은 장관급인데 장관급한테 밑에 사람이 시켜서 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내가 난리를 쳤을 것"이라며 "전화 통화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23일 오전 9시30분 경 실무자들을 불러 최종 결재안을 논의했다. 30분 후 정 위원장은 전원회의 개최를 위해 자리를 떴다. 김 부위원장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의견을 들어보라'는 정 위원장 지시에 이날 오후 3시30분 경 부총리 집무실을 방문했다.

정 위원장은 회의가 끝난 뒤 밤 10시 경 실무자를 호출해 500만 주 처분안인 2안에 결재 싸인을 했다. 김 부위원장은 이 사실을 저녁 6시50분 경에 미리 파악하고 최 비서관에게 '위원장님 2안으로 결정하셨음. 보도관련 신경써주소. 특히 조선일보'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정 위원장은 최 전 부총리 측으로부터도 '2안 권고' 취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정 위원장은 최 전 부총리로부터 "왜 이런 걸 나에게 보고하느냐. 위원회에서 알아서 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답을 들었다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의 말은 다르다. 그는 "부총리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입장을 물어봤다. 나는 2안이 더 합리적이라고 했다"며 "'그럼 2안으로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부총리가 말했다"고 정 위원장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정재찬 위원장이 2안 결정을 미루자 안종범 수석의 의견을 들은 청와대 경제수석실 최상목 비서관이 안 수석의 이야기를 하면서 증인에게 2안으로 갈 것을 요구한 것 아니냐"는 특검 측 신문에 김 위원장은 "아니"라고 답했다.

'모른다'면서 결정은 '500만 주' 신속 결정… 의뭉스러운 정재찬

'23일 이전 '2안' 결정에 대한 요청을 들은 적 없다'고 주장하는 정 위원장은 2안이 추가된 결재 문건도 23일 당일이 돼서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정 위원장의 말을 종합하면 "순환출자고리 사안에 전문성이 없어 이전 보고서 내용과 공정위 전원회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면서도 "30분 내에 '500만 주 2안'으로 결정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 위원장은 23일 오전 9시30분부터 10시까지 30분 동안 1안 결정을 주장하는 실무자들과 대화한 후 당일 10시 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공정위 전원회의를 열었다. 김 부위원장이 오후 6시50분 경 '위원장이 2안으로 결정했다'고 보고 문자를 전송한 점에 비춰 정 위원장은 전원회의 도중 혹은 회의가 끝난 직후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다.

특검 측이 이와 관련 경위를 묻자 정 위원장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답했다.

"실무적 쟁점, 내용을 모르고 확신도 없었다고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결정은 했다. 무슨 기준을 가지고 결정했느냐"는 재판부 측 물음에 그는 "누차 말했지만 정부 내 비판, 국회·언론의 삼성에 특혜를 줬다는 비판을 의식했다. 주식 몇 백만을 처분해야하는지 이런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며 "어느 쪽이 감당하기 쉬운지, 경제 충격이 어떤게 덜한지 등을 생각했다"고 밝혔다.

삼성과 공정위의 만남엔 "공정성 의심받아, 부적절"

정 위원장은 11월17일 김학현 부위원장이 '대상기업'인 삼성그룹의 김종중 전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급)과 저녁식사를 한 것에 대해 "부위원장이 바깥에서 특정인을 만나서 그렇게 했다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또한 김 부위원장이 삼성그룹 측 임원에게 공정위 논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알려 준 것에 대해서도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부위원장은 12월17일 경 삼성 측 법률대리인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관계자 서아무개씨와 4회 가량 통화했다. 정 위원장은 이에 대해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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