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방송산업은 공적 서비스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다. 지상파방송사의 네트워크 내에서 방송콘텐츠의 생산과 송출이 모두 이루어지는 수직통합구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과 송출이 분리된 현재, 방송산업은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의 형태로 전화됐다. 

방송콘텐츠가 ‘공짜’가 아니라 이윤을 창출할 ‘상품’으로 변모한 건 1995년 케이블 TV가 등장하면서다. 다른 산업 분야의 자본이 케이블 TV 사업에 진출하면서 지상파가 아닌 새로운 채널이 생겼고, 전국적인 유선TV망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선방송사업이라는 새로운 방송콘텐츠 유통자본도 등장했다.

새로운 채널이 생긴 만큼 외주제작 프로그램 시장도 넓어져 다큐나 교양 장르를 중심으로 외주제작사가 등장했다. 방송사 외부의 비공식적 노동자들의 수도 이전과는 다른 규모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춰 방송콘텐츠산업 예비 노동자들의 양성소인 사설교육기관(이른바 아카데미)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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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iStock.
방송콘텐츠, ‘공짜’가 아닌 ‘상품’으로 변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방송산업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한국자본들의 이윤이 축소되면서 방송사의 가장 큰 수입원인 광고비가 급감됐고 이는 정리해고와 같은 강력한 노동유연화로 이어졌다. 당시 지상파방송사 인력의 10%~29%이 감축되거나 자회사로 분사됐다. 

또한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제정되면서 정부 차원에서 노동의 외부화를 통한 불안정노동의 양산을 승인했다. 그 결과 법이 시행된 지 2년 후인 2000년에는 방송차량 운전사, 카메라 보조, 오디오맨, 웹디자이너 등 7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더불어 케이블TV에 진출한 자본 간의 인수·합병이 가속화되면서 복수채널사용사업자(MPP), 복수유선방송사업자(MSO) 등 거대 자본이 탄생했고, 디지털 6mm 카메라와 ENG로 대표되는 기술혁신이 방송콘텐츠산업에도 적극 도입됐다. 기술혁신은 방송사 외부의 계약직, 프리랜서 PD라는 값싼 노동력의 양산으로 이어졌다. 

▲ KBS비정규직노조는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임금인상과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총파업 출정식을 열었다. 출정식 중간에 진행된 집행부의 삭발식에서 머리를 깎던 조합원이 오열하고 있다.

▲ KBS비정규직노조가 지난 2013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임금인상과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총파업 출정식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외환위기, 지상파 10~29% 구조조정 

이런 노동시장 속에서 2000년대 이후, 눈에 띄는 변화는 방송사 매출구조의 변동이다. 인터넷은 온라인광고를 성장시키는 반면 방송광고의 정체를 불러왔다. 방송광고시장 내부에서도 유료방송의 성장으로 지상파방송사가 방송광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하락하고 있다.

따라서 방송사는 광고매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재전송료나 프로그램 판매, 판권 판매 등 방송콘텐츠 저작권 기반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상품의 매력도를 높이고 다양한 플랫폼에 콘텐츠를 제공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방송콘텐츠제작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방송콘텐츠제작경쟁력 강화 시도가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방송광고시장의 위축과 방송콘텐츠제작단가의 지속적인 상승 등으로 인해 실제 방송사가 방송콘텐츠제작비에 투자하는 규모는 2012년 이후에 오히려 둔화되고 있다. 

실제 2012년 지상파방송사가 1조 1926억 원, 케이블채널사가 1조 6706억 원이었던 투자 규모는 2015년에는 지상파방송사 1조 656억 원, 케이블채널사 1조 4332억 원 이었다. 이는 자체 제작 규모는 줄이되 외주제작 의존도를 높이는 방식, 자체제작 부문 역시 방송사 외부의 노동력에 대한 인건비를 줄이는 것으로 가능했다.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OTT시장 가입자 수가 2500만 명을 넘어섰고 모바일TV 유료가입자 수도 1100만 명에 달하는 등 온라인·모바일 기반의 방송콘텐츠시장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지만 경쟁력을 가진 플랫폼의 증가는 아직까지는 한정적인 시장 내에서 시청률 경쟁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한미 FTA와 한중 FTA 발효로 인한 해외자본의 방송콘텐츠 증가도 변수다. 이는 유료방송과 지상파방송사, 복수채널사용사업자, 해외 OTT자본 간의 경쟁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 과정에서 개별 자본의 수익은 악화된다. 하지만 이에 대항할 노동의 힘은 약하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구조가 이른 시일 내에 극복될 리는 만무하다.

▲ 사진=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페이스북
▲ 사진=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페이스북
인건비 후려쳐서 만들어지는 방송 콘텐츠 

방송콘텐츠산업과 관련하여 자본의 방향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다. 콘텐츠산업은 이런 흐름의 최첨단에 자리 잡고 있다. 콘텐츠는 문화와 예술을 활용하지만 ICT와 결합하여 대중에게 전달되는 상품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노동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먼저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등장이다. 콘텐츠가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면서 방송, 통신, 인터넷 등에서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 이는 매체 간의 이직만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던 직업군들도 생겨나게 할 것이다.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노동시장이 확립될 것이다. 

다음은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확대된다는 점이다. 콘텐츠와 플랫폼 간 결합은 강화되는 추세인데, 이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거대 자본이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또한 개인의 플랫폼 이용습관에 맞춘 콘텐츠 생산의 확산은 콘텐츠 생산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 1인 크리에이터와 소형 콘텐츠제작사 등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본이 필요한 것은 콘텐츠라는 상품을 기획할 노동력이지, 콘텐츠를 제작할 노동력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시장의 극단적인 이중구조화가 이루어지고 프리랜서와 같은 특수고용만이 아니라, 경제적 종속성을 가진 자가고용 등 자영노동이 확대될 것이다.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노동자들

이런 변화는 우려스럽다. 흥행 여부에 따라 높은 수익을 안게 된다는 산업의 특성으로 인해 노동이 자기 종사 부문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콘텐츠 산업의 경우 ‘콘텐츠 산업 노동자’ 가 아니라 PD, 방송작가, 영화 조명감독, 출판 편집자 등 특정 ‘전문가적 직종 정체성’이 형성돼 있다. 

실제 방송산업에서는 외주제작사와 방송사 간의 제작비 현실화와 저작권 양도 문제가 대두된 지 오래됐고, 출판산업에서는 출판사와 유통사 간의 공급률 갈등을 시작으로 중고서점 규제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때 노동자들은 자기 종사 부문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즉 기술의 혁신과 함께하는 자본의 이윤추구방향은 노동자라는 정체성의 약화를 가속화시키는 반면, 고용형태와 직종과 산업을 초월한 콘텐츠산업 노동자들의 연대는 더 어려워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새로운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조건과 미래의 전망을 바탕으로 노동의 주체적 과제를 찾아야 하다. 이어지는 3회에서는 이와 관련한 기본적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원문 전체보기 : <TV 속 무자비한 착취 구조의 전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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