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책임심의위원으로 활동한 문학평론가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를 선정 대상에서 배제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 평론가는 당시 위원들이 단 한 명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히자 예술위원회는 심의와 책임심의제도 자체를 없앴으며, 자신은 ‘정권 바뀌면 장난친 사람들 감옥에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예술위원회에서 죄지을 것을 강요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경고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봄부터 2015년 6월까지 예술위원회 책임심의위원이었던 하응백 문학평론가는 2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 주재로 열린 김기춘 조윤선 등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직권남용) 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 같이 증언했다.

하 평론가는 문화예술위원회의 지난 2015년 아르코 문예창작기금 심의 과정에서 이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책임심의위원들이 당시 3차 심의에 102명을 선정하자 문화예술위원회 직원 두 명이 자신의 인사동 사무실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하 평론가를 찾아온 문예위 직원들은 ‘102명 중 18명이 검열에 걸렸는데 문체부에서 강력하게 배제할 것을 지시해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아르코 사업 자체를 무산시키려 하니 다른 심의위원들을 설득해 도장을 찍어줄 수 있겠느냐’며 의사타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내용을 이용복 특검이 묻자 하 평론가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 자리에서 18명 중 한 명만 알려달라고 하자 직원들은 이윤택을 알려줬다고 하 평론가는 전했다. 하 평론가는 이윤택씨는 당시 희곡을 써서 가장 높은 점수로 심사를 통과한 문학가였으나 배제한 이유에 대해 ‘문재인지지 연설을 한 것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는 직원들의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하 평론가는 2015년 6월5일 경 대학로에서 열린 회의에서 책임심의위원들이 당시 새 위원장으로 내정된 박명진 위원장에게 문체부장관에게 18명을 구제해달라고 요청해보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당시가 금요일일이었다. 동숭로에서 심의하는데, 아침에 새로 당시 위원장이었던 권영빈 위원장 후임으로 박명진 위원장이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회의에 참여했다. 예술위 직원들은 18명을 제외하고 우리한테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는데 우리는 도장 찍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새로 선임된 박명진 위원장이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의 논문을 심사했다더라, 서로 아주 친하지 않느냐, 그러니 18명을 자르지 말고 차라리 다 구제해달라고 부탁해보라, 안 자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공을 넘겼다.”

▲ 한국예술위원회 책임심의위원으로 활동한 하응백 문학평론가가 2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30부 김기춘 등의 블랙리스트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한국예술위원회 책임심의위원으로 활동한 하응백 문학평론가가 2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30부 김기춘 등의 블랙리스트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 평론가는 “나흘 뒤인 2015년 6월9일 박명진 위원장이 임명장을 받은 뒤 다시 회의를 소집해 예술위원회 장용석 부장에 물었더니 박 위원장에 그 뜻을 전달했다고 했다”며 “하지만 예술위의 장 부장은 ‘문화부장관에게 노력했는데 18명 중 8명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한다, 8명은 빼고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문학 외적인 일로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판단해 도장을 못찍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장 부장은 어딘가에 전화하더니 ‘도장을 찍지 말고 심의위 하지 말라’고 해서 (아예 3차 심의위 회의 자체를) 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회의 자체가 열리지 않은 것이다.

이를 두고 하 평론가는 당시 “이를 진행할 사람은 반드시 감옥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글 쓰는 사람은 반드시 이를 쓸 것이며, 만약 도장을 찍으면 우리가 을사오적이 된다. 적은 보수에도 많은 일을 하는 책임심의 업무를 맡는 것은 명예 때문이었다. 20~30년 문단에서 문인으로 활동하다 책임심의위원으로 불러주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기준으로, 문학외적인 기준으로 그런 것을 하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누가 장난치는지는 모르나 정권이 바뀌면 반드시 감옥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주변 사람도 그렇죠, 그렇게 되겠죠라고 했다.”

하 평론가는 문화예술위원회는 아예 홈페이지에도 공고하지 않고 102명 중 30명을 뺀 채 70명만 지원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책임심의위원 제도자체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 평론가는 “말을 안들으니 책임심의위원제도를 폐지한 것”이라며 “(이후엔) 어떤 절차를 거쳐 진행되는지 알 수가 없게 돼 있다. 그러니 장난치기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어야죠”라고 덧붙였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블랙리스트 재판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블랙리스트 재판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변호인이 ‘의견을 (책임심의위원들에게) 전달한 것만으로 정권 바뀌면 감옥갈 것이라고 하는건 과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하 평론가는 “물어보는 게 굉장히 교묘하다. 결국 30명을 자르지 않았느냐. 그 때 이미 예측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 평론가는 “18명에게 못주겠다고 도장을 우리가 찍으면 그 사람들을 빼고 (지원금을) 주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고, 그들이 우리에게 죄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간다고 말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하 평론가는 미디어펜이라는 보수 우파 인터넷 매체에 낚시 칼럼을 게재하고 있느냐는 질의에 “그렇다”며 “미디어펜 사주는 데일리안 편집인 이의춘이 독립해서 창간한 보수우파적인 매체 맞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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