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은 훗날 규정되기 마련이다. 모든 산업혁명이 그랬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만은 예외다. 일어나지도 않았고, 정확한 기준도 없고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지만 산업계와 정치권에서 막연한 변화를 과장하며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마법의 주문’처럼 쓰이고 있다.

이번에는 공영방송도 나섰다. KBS는 지난 21일과 22일, 보도를 통해 “4차산업혁명시대를 앞두고 공영방송 역시 ‘거대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공영방송에 채널을 늘리도록 정부가 허가하고 모바일 플랫폼 확장을 해야 하며 “중간광고 금지 등 규제를 완화하는 제도적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나온 곳은 21일 열린 한국방송학회 학술대회의 ‘4차 산업혁명시대 공영방송의 위상과 역할’과 ‘지상파 UHD 양방향 방송서비스의 필요와 원리 제도적 해결 과제’ 두 세미나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와 KBS의 보도는 크게 달랐다. 우선, KBS는 공영방송 세미나의 후원사가 KBS였고 UHD세미나의 후원사가 KBS 고대영 사장이 협회장인 한국방송협회라는 사실을 누락했다. 학회 학술대회는 특정 사업자가 후원을 하면 학회와 논의를 통해 주제와 발제자를 공모 받은 후 선정하는 시스템이다. 제3자 화법으로 다룰 게 아니라 KBS가 관여한 행사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어야 한다.

▲ 22일 KBS 뉴스광장 화면 갈무리.
▲ 22일 KBS 뉴스광장 화면 갈무리.

현장에서는 쓴소리가 쏟아졌지만 KBS는 유리한 내용만 모아 보도에 내보내기도 했다.

발제자인 정윤식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KBS 수신료 인상 등 규제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위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우선적으로 요구했다. 그는 현재 공영방송 이사를 “정당 에이전트”라고 비유하며 “(현재 방식으로는) 공영방송이 전쟁터가 되기 때문에 품격 있는 전문가들을 뽑도록 이사추천방식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윤식 교수는 발제를 마무리하며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KBS가 공정성을 확보하고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도덕성, 자기절제, 사회적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못 나간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차이를 보였지만 토론자 4명중 3명 역시 공영방송의 공영성이 전제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KBS 카메라는 자리를 지켰지만 이 같은 현장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단 한마디도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자사가 후원한 세미나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쓴소리는 외면하고 유리한 것만 짜깁기했다. 이처럼 공영방송이 공영성을 확보하라는 비판을 담지 못하는데, 시민들이 어떻게 규제완화에 동의할 수 있을까. 결국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4차산업혁명이라는 구호는 규제완화를 요구하기 위해 만든 명분에 불과해 보였다.

현장에서 김경환 교수는 변화를 앞두고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해야 할 일은 규제완화가 아니라고 꼬집었다. KBS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진짜 4차산업혁명이 이뤄진다면 인간의 삶과 노동, 가치관이 변화하고 인간소외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KBS가 이 문제에 통찰력을 갖고 (사회적인 문제를) 진단하는 데 노력하는 게 4차산업혁명을 맞이하는 KBS의 역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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