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명단)’의 실질적 집행을 도맡은 관계자가 “김기춘 전 비서실장 부임 후 ‘좌편향’ ‘좌익’ 표현을 문체부에서 듣기 시작했다”며 “BH(청와대)의 지시였기에 저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담당 실무자로서 굉장히 죄송스럽다”고 증언했다.

문체부 내 ‘블랙리스트’ 집행 말단 실무자 역할을 한 오진숙 전 문체부 예술정책과 서기관은 12일 오전 ‘김기춘 등 4인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2014년부터 2016년 중순까지 2여 년 간 청와대에 십수 건의 문건을 보고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날 공개된 오 전 서기관이 작성한 블랙리스트 관련 보고 문건만 15여 건이 넘는다. 이념편향 논란의 사업선정관련 대책방안(2014.3), 건전 문화예술 생태계 진흥 세부 실행계획 문건(2014.10), 2015년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신청현황(2014.11~2016.1, 7여건), 건전콘텐츠 활성화 TF 주요 논의사항 문건(2015.3), BL(블랙리스트) 관련 경위 문건 등이다.

오 전 서기관은 문건은 청와대의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 및 집행 지시에 따라 작성한 것이며 청와대는 관련 사항을 모두 보고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BH가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에 관심이 굉장히 많았다”면서 “이 사업은 수시 지원이 아니라 1년에 한번 공모하는 것이기에 지원사업 정기 공모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신청을 받은 시점(2014년 11월)에 다 해서 청와대에 신청자 명단을 보냈다”고 밝혔다.

오 전 서기관은 특검 참고인 조사에서 ‘누가 블랙리스트를 지시했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내가 듣기로는 김기춘 비서실장”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오 전 서기관은 “상관을 통해 물어보면 ‘교문수석실은 아닌 것 같다’ ‘청와대에서 제법 높으신 분‘ 이런 얘길 들었다”며 “김기춘 실장 부임 시기에 좌편향, 좌파 이런 얘기를 상관으로부터 굉장히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구속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2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구속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2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그는 실제로 김 전 실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거나 블랙리스트 관련 얘기를 들은 적은 없다고 밝혔다.

오 전 서기관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윗선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다. 오 전 서기관은 2015년 4월13일 60여 명 규모의 예술인 지원배제 명단을 “‘정무에서 온 것’이라고 국장이나 과장을 통해 전달받았다”며 “그래서 (문건에) ‘정무리스트’라 표기했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지원에서 배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전에도 정무수석 이름이 내부에서 자주 오르내렸다”며 “정무리스트라고 확실하게 얘길 들었다”고 말했다.

정무리스트를 받은 지 3개월 여 후 문체부 예술정책과는 정무수석실로부터 113여 명 규모의 블랙리스트를 받았다. 해당 문건 지원배제 대상 이름 옆에는 ‘문재인 후보 지지’ ‘MB정부 비판’ ‘민주노동당 지지선언’ 등의 배제 사유가 기재돼 있었다.

오 전 서기관은 “당시 (문체부는) 배제 명단을 줄이는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명단이 많아져 당혹해하며 대책 마련했다”며 “청와대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블랙리스트 집행 지시 실무를 맡은 것에 대해 “문화예술쪽 부서에 10년 이상 근무해 이쪽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갑자기 지원배제 명단이 오고, 처음엔 외부 심사위원 결정 시스템이니괜찮겠지라고 편하게 생각했는데 점점 강도가 세졌다”며 “굉장히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고 그 일을 수행한 예술위 직원도 힘들었을 것이고, 예술계도 같이 힘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집행 담당 사무관으로 굉장히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2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2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오 전 서기관은 2015년 1월 경 자신이 작성한 ‘2015년 문예진흥기금 신청 현황 문건’에 나온 B는 청와대, K는 국정원임을 확인하며 해당 기관이 내려 보낸 문건을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에 활용했다고 밝혔다.

김기춘 전 변호인 측의 ‘협박이나 강요가 없었지 않느냐’는 지적에 그는 “문건 작성 계기 자체가 BH 지시에 의한 것이어서, BH가 지시해서 예전에 없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답했다.

오 전 서기관은 “BH 지시사항은 공무원에게 가장 강력하다"며 "거부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오 전 서기관이 블랙리스트 집행 업무에 관여할 당시 정무수석은 2013년 8월부터 2014년 6월까지는 박준우 전 정무수석이, 2014년 6월부터 2015년 5월까지는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맡았다.

‘김기춘 등 4인의 블랙리스트 재판’ 2회 공판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황병헌 부장판사)의 심리로 12일 오전 10시10분 서울중앙지법 중법정 311호에서 열렸다. 피고인은 김 전 비서실장을 포함해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김상률 전 교문수석비서관, 김소영 전 문화체육비서관 등 4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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