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2014도2946 피고인 강기훈. 검사 상고를 기각한다.”

저 한마디를 듣기 위해 싸웠던 시간이 24년이었다. 사법부의 치욕이자 언론의 치욕으로 남은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그렇게 허탈한 마침표를 찍었다. 강기훈은 대법원 무죄확정판결이 난 2015년 5월14일 언론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1991년 사건 당시 그를 취재했던 김의겸 한겨레 기자가 강기훈에게 전화를 걸어 왜 안 나왔는지 물었다. “그냥…들러리 서기 싫어서….” 1991년 5월 김의겸 기자와 인터뷰에서 “승리는 진실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던 이 청년은 이제 간암투병으로 쇠약해진 중년이 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체제는 역설적으로 반동적인 노태우정부와 함께 시작했다. 노동운동·통일운동진영이 노태우정부의 폭압에 맞서 연일 투쟁수위를 높여가고 있던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공권력의 과잉진압은 전국적 분노를 일으켰다. 대학생들이 연달아 분신했다. 6월29일까지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만 13명이었다. 노태우정부 반대시위는 87년 이후 최대 규모로 이뤄졌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노태우정부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국면을 떠올리며 노심초사했다.

▲ 1991년 5웡5일자 조선일보 김지하 칼럼.
▲ 1991년 5웡5일자 조선일보 김지하 칼럼.
그 때 조선일보와 시인 김지하는 구원투수처럼 등장했다. 시인 김지하는 5월5일자 조선일보 1면 칼럼을 통해 “젊은 벗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외쳤다. 이 시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출발점”이라고 강조하며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부독재와 싸웠던 시인의 칼럼은 역설적으로 노태우정부의 다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5월8일 오전 8시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인 뒤 노태우 퇴진을 외치고 투신했다. 옥상에선 유서 두 장이 발견됐다. 동아일보는 사건을 목격한 서강대생 증언을 토대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옥상위에서 혼자 팔을 치켜들고 구호를 외친 뒤 갖고 있던 라이터로 온 몸에 불을 붙이고 곧바로 뛰어내렸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준비나 한 듯이 이 사건이 계획됐다는 프레임을 곧바로 들고 나왔다. 김지하 칼럼이 운동권의 비인간성을 주장하는 선언이었다면, 검찰수사는 선언을 뒷받침하는 과정이었다.

조선일보는 5월9일 지면에서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후 일어난 4건의 연쇄분신사건이 방법이 유사하고 호남-영남-경기-서울 분포를 이루고 있다”고 전하며 “검찰이 분신사건에 적극적으로 수사에 착수한 것은 이들 분신사건이 우발적이라기보다 계획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조선일보는 “검찰이 분신사건의 계획성에 수사의 초점을 맞출 경우 운동권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자초할 소지도 크다”고 덧붙이며 검찰의 의도 또한 눈치 채고 있었다.

정구영 검찰총장 등 검찰 관계자는 5월8일 기자들과 만나 이 사건이 계획적일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한겨레 5월9일자 지면에서 대검 관계자는 “시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운동권에서 내부적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8일 박홍 서강대 총장의 발언과 묘하게 이어졌다. 박홍은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이용하는 반생명적 세력이 분명히 있다”며 “이 세력의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은 끝내 배후세력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조선일보는 5월10일자 사설에서 “교육자다운 용기 있는 발언”이라며 박홍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당시 언론보도.
▲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당시 언론보도.
제도언론은 검찰발 기사 쓰기에 급급했다. 5월9일자 조선일보는 <분신현장 2~3명 있었다 : 목격교수 진술, 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옥상엔 혼자 있었다 : 서강대 운전사 경찰에 밝혀, 목격 교수들 “2~3명 있었다고 말한 적 없다”>라는 정반대의 기사가 실렸다. 바로 다음날인 10일자에서 조선일보는 문제의 목격교수인 윤여덕 서강대 교수의 반박을 담았다. 윤 교수는 맞은 편 본관 옥상에서 흰 점퍼자림의 누군가를 봤는데 정황상 사건 직후 옥상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본 서강대생들이었다. 검찰 주장을 철썩 같이 믿었던 조선일보가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은 검찰 뜻대로 움직였다. 박홍 발언에 무게감을 얹고 사건에 미스터리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예로 5월9일자 중앙일보는 “분신직후 다른 사람이 즉시 유서를 공개하거나 현장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본관 5층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전날 저녁부터 잠겨있었음에도 외부인인 김씨가 올라갈 수 있었다”며 외부인의 ‘조력’ 가능성을 강조했고, 박홍 총장의 발언에 대해선 “검찰은 사회민주화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 박 총장이 자칫 재야운동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을 한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남대생 윤용하는 김기설에 이어 5월10일 분신을 시도하며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분신을 배후조종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잇따른 청년들의 죽음은 노태우정부에 의한 엄연한 타살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국면을 자살방조사건으로 몰고 가며 운동권의 메시지를 패륜으로 덮어버리려 했던 노태우정부는 서서히 안도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유서 대필’이었다.

국민일보는 5월18일자 지면에서 “검찰은 김씨가 남긴 유서 필적이 자필과 다른 사실을 밝혀내 유서를 대신 써준 사람을 찾아내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일보는 5월19일자 지면에서 “검찰이 자살방조혐의의 유력한 용의자로 전민련간부를 지목하고 신병확보에 나선 것은 잇따른 분신사건에 배후세력이 있다는 가설을 입증해주는 것이어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이 소설 같은 상황에 깊이 몰입했다. 전민련측 반박은 검찰 주장과 비교할 수 없이 작게 처리됐다.

▲ 1991년 5월, 강기훈씨(가운데)가 유서대필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필체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1991년 5월, 강기훈씨(가운데)가 유서대필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필체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조선일보는 19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한국의 연쇄자살 사건이 크게 실렸다며 기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요지는 이랬다. “젊은이들의 자살이 그 어떤 경로를 통해 중앙에서 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이 지령이 실의에 빠지고 고립된 북한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은밀히 암시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지령이 운동이 점점 무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급진주의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사보다 창작에 가까운 대목이었다. 조선일보는 뉴욕타임스의 권위를 빌려 독자를 흔들었다.

이 신문은 “만약 자살의 의도가 87년처럼 한국의 중간계층을 다시 한 번 거리에 끌어들여 급진파 학생들의 말처럼 전정권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정부를 쓰러뜨리는데 있다면 자살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노정권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안전한듯해 보인다”고 전했다. 너희가 아무리 목숨을 바치더라도 노태우정부는 안전하다고, 언론이 대신 대변한 꼴이었다. 당시 언론사가운데 오직 한겨레만이 검찰발 주장을 반박하며 강기훈측 주장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검찰은 박홍 기자회견 사흘 뒤인 5월11일 김기설 필적이 있는 업무일지 제출을 전민련 측에 요구한 뒤 13일 김기설의 애인 홍아무개를 불러 100시간 넘게 조사했다. 그리고 16일 강기훈을 유서대필 혐의자로 지목했다. 5월21일자 조선일보는 “강기훈이 김기설 분신직후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김기설의 애인 홍아무개를 만나 수첩에 김기설이라는 글자와 전민련 전화번호를 써줬다”고 보도했다. 자신의 필적을 김기설의 필적으로 제출하게끔 했다는 것이었다. 전민련측은 “홍아무개를 만난 건 사실이나 수첩에 글씨를 써주진 않았다. 검찰의 강압수사에서 (홍아무개가) 착오로 진술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 1991년 6월22일 언론과 인터뷰중인 강기훈씨(가운데). ⓒ연합뉴스
▲ 1991년 6월22일 언론과 인터뷰중인 강기훈씨(가운데). ⓒ연합뉴스
하지만 강기훈을 향한 마녀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언론은 강기훈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자 공권력이 실추됐다고 강조했으며, 강기훈에게는 “결백하면 수사에 응하라”고 주장했다. 강기훈을 대변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향해서는 “과잉옹호”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5월25일, 검찰은 전민련이 제출한 김기설의 수첩이 조작됐으며,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검찰은 김기설 필적과 유서 필적을 감정한 결과 필적이 다르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결과를 핵심근거로 내세웠다. 그리고 강기훈이 1985년 경찰서에서 쓴 자술서와 유서가 동일필적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겨레만이 “사설감정기관에 의뢰한 결과 전민련이 제출한 김씨 수첩과 유서가 동일필적으로 나타나 국과수 감정결과와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문제의 수첩에는 숨진 김씨밖에 쓸 수 없는 내용이 다수 들어 있다”며 ‘고군분투’했지만 수사결과를 바꿔놓지 못했다.

김기설의 필체를 찾아다니며 강기훈의 억울함을 풀고자 했던 김의겸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김기설의 새로운 필체가 나타날 때마다 ‘이제는 검찰이 수사를 끝내겠지’하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매번 좌절이었다. 검찰은 어떤 증거가 발견돼도 다 조작이라고 했다. 특히 김기설이 쓰던 전민련 수첩이 발견되었을 때가 그랬다. 수첩은 누가 봐도 유서와 같은 필적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검찰이 ‘수첩의 절취선이 맞지 않는다’며 그 수첩마저 강기훈이 급하게 조작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검찰은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를 앞세워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7월12일 기소했다. 7월13일자 한국일보는 “결정적 증거 없이 이 빠진 공소”라고 지적했고 세계일보 또한 “검찰도 (강씨를) 연행한 이후 수사에 진척이 없다고 인정했다”며 “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이 유일한 증거”라고 보도했다. 검찰은 대필 일시와 장소도 밝히지 못했다. 대신 검찰은 1심 첫 공판에서 “혁명을 위해선 자신의 아버지도 죽일 수 있는 것이 공산주의자”라며 강기훈이 친구의 죽음을 혁명을 위해 이용했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이후 8월1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추가됐고 법원은 강기훈에게 징역3년형을 선고했다.

▲ 1992년 3월26일 구속수감된 강기훈씨가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연합뉴스
▲ 1992년 3월26일 구속수감된 강기훈씨가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연합뉴스
법원은 판결문에서 “김영형 등 감정인들이 검찰 의도대로 감정했다는 증거가 없고 변호인이 김기설의 필적이라 제출한 자료는 많은 부분 조작된 흔적이 있다”며 “체제타도를 목적으로 자살을 방조하는 것은 엄벌에 처해 마땅하지만 대필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 필적감정논란과 법적 다툼으로 지면이 채워지며 다른 주요 사건들은 묻혔다. 무엇보다 노태우정부 비판여론이 지면에서 크게 줄었다.

당시 권영길 언론노조위원장은 “김씨가 전민련의 부추김에 의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동적이지도 않은 짤막한 유서까지 남에게 대신 쓰게 해가며 선전효과도 적은 아침 8시에 범행을 벌였는지 하는 정반대 의심이 오히려 가능하다”고 반박하며 “검찰에는 대필이 입증되지 않으면 사건을 미궁에 빠뜨려 책임을 피하고 시국냉각이라는 정치적 효과에 만족하는 퇴로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강기훈 변론을 맡았던 이석태 변호사는 훗날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동료가 죽으려고 마음먹었을 때 말리지 않고 유서를 대신 써줄 수 있는 조직으로 국가가 전민련을 몰면서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불신감을 깊이 드러낸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은 대필의혹이 밝혀져야 한다면서도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소홀했다. 의도적으로 소홀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른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는 5월27일자 지면에서 김기춘 신임 법무부장관을 두고 “깔끔한 외모에 업무처리가 빈틈없고 치밀해 완벽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검찰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박홍 총장은 이 무렵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어둠의 세력은 실존단체가 아니라 죽음을 선동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밝힌 뒤 “목적을 위해 생명을 도구화하는 영혼의 그늘은 단호히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재야운동의 도덕성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1991년 5월24일자 중앙일보 기사.
▲ 1991년 5월24일자 중앙일보 기사.
이런 가운데 국과수의 김기설 유서 필적감정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MBC보도가 1992년 등장했다. 당시 홍순관 MBC기자는 6개월간의 취재 끝에 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이 수많은 문서를 허위감정 해왔다고 보도하며 국과수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줬다. 하지만 MBC는 해당 기사를 축소시켰다. 김형영 구속이 임박했던 2월14일 MBC <뉴스데스크>는 이 사건을 14번째 아이템으로 배치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단순한 뇌물수수사건으로 몰고 갔다.

강기훈은 김형영의 구속사실을 교도소에서 접했다. 그는 훗날 1994년 8월17일 만기 출소한 뒤 언론노보와 인터뷰에서 “(국과수 필적감정조작이) 예상대로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또 한 차례 언론에 대한 불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의 언론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나약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한 뒤 “이제 상품가치가 없는 나를 신문들이 찾겠나”라며 씁쓸해했다.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강기훈 본인만큼은 이 사건을 잊을 수 없었다. 2007년 참여정부 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국과수 감정결과는 조작된 것이었다. 김기설의 필적이 담겨 있던 노트를 분석한 결과 국과수 및 7개 사설감정기관은 김기설 유서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노태우정부의 유서대필조작사건은 김형영이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강기훈은 2009년 9월 서울고법에서 재심 개시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

2014년 1월16일 법정 최후진술에서 강기훈은 말했다. “지난 20여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꿈속에서도 무한 반복되는 장면으로 고통을 겪었다. … 누구를 욕해야 할지 모르겠다. … 끝없이 지속됐던 불면의 나날과, 여러 사람들을 저주하며 보냈던 시간과도 이별하고 싶다.” 그해 2월13일 서울고법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법은 강기훈의 필적과 유서 필적 중 ‘ㅎ’과 ‘ㅆ’의 필법이 다른 점에 주목했다. 유서의 ‘ㅆ’은 제2획이 없는 독특한 글씨체였지만 강기훈 글씨는 그런 특징이 없었다. 23년 전에도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2015년 5월14일 대법원의 무죄확정판결이 난 다음날,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재판부마다 다를 수는 있다.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라며 엉뚱한 주장을 폈다. 이 신문은 “모든 법관은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고 적었다. 어디 법관뿐이랴. 검찰 측 주장을 확대재생산하며 한 인간의 삶을 망가뜨린 공범치고는 예의가 없었던 사설이었다. 모든 언론은 자신들의 기사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

▲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확정판결을 받은 뒤인 5월27일, 1991년당시 전대협 집행부들이 광화문 광장 앞에서기자회견을 열고 조작사건 관련자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확정판결을 받은 뒤인 5월27일, 1991년 당시 전대협 집행부들이 광화문 광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작사건 관련자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조작사건이 국과수 김형영 개인의 일탈이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언론이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헤쳤다면 아마 노태우는 대통령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수 있다. 1992년 대선에선 김영삼이 당선되지 못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 지금처럼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청년들의 죽음이 가리켰던 ‘사회 변혁’의 열망을 ‘유서 대필 공방’으로 몰고 가며 체제유지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 거대한 사기극의 공범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수십 년 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894년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유배를 당했다.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했으나 프랑스 군 검찰은 필적감정 결과를 조작했다. 하지만 작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 한다>란 글을 통해 드레퓌스가 누명을 썼고 군 고위층이 범죄를 은폐했다고 주장했고 드레퓌스는 1906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국사회는 이 조작사건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법무부장관 김기춘은 박근혜정부 ‘왕실장’으로 불리며 2017년 촛불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건재했다. 곽상도 검사는 2013년 민정수석이 되어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만나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식 관련 정보를 넘겨 국가정보원 대선개입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조작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1991년의 과거로 되돌아갈 순 없다. 청년 강기훈의 눈빛이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뉴스의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의제(어젠다·agenda)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여과를 거친 의제는 복잡한 이슈를 찬반 양자택일 구조로 형성하고 여론이 기술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에만 몰두하게 했다. 또한 언론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할 힘조차 미화시켜 역사적 국면마다 흉기로 둔갑하곤 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미디어오늘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체제 3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史에서 언론·국가·자본권력이 첨예하게 갈등하거나 야합했던 주요한 사회적 모멘텀(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꾸는 장면)을 제공했던 사건들을 프레임(개념 틀) 전쟁이란 관점에서 14회에 걸쳐 연속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을 성찰하고 되짚어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겠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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