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혐의를 부인해왔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전보다 다양한 반론을 장전한 채 첫 재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 전 실장은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을 '믿을 수 없는 증거'라 규정하는가 하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증언은 위증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김 전 실장은 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황병헌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문화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명단)' 사건 제1회 공판에 출석해 이같이 밝혔다. 김 전 실장은 구속되기 전 준비한 검은색 뿔테 안경을 끼고 회색 상의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법정에 등장했다.

▲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재판 말미인 오후 6시30분 경 발언권을 얻은 김 전 실장은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할 단서인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일지의 증거력을 부정했다.

그는 "이 비망록(업무수첩) 읽어보면 자기 의견을 주로 많이 쓰고 때때로 장(長) 표시가 있다. 長이 없는 건 당연히 내 발언이 아니고, 長 표시 있는 것도 전부 내 발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비망록이 특히 신뢰할 상황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을 드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를 들면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 이틀 전인 17일 비망록에 長 써놓고 '통진당 해산확정, 비례대표 의원직 상실, 금일 소장 이견 조율 중, 조율되면 19~20일 초반' 기록이 있다"면서 "전혀 객관적 사실이 맞지 않고 그런 적도 없었다"고 항변했다. 헌재 재판관은 해산 선고 30분 전에 표결을 했는데 결과를 이틀 전에 알 리 없다는 취지다.

이 발언은 자신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을 흔드는 전략으로 보인다. 김영한 업무수첩은 '죽은 김영한이 산 김기춘을 잡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통령 및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일지이기 때문이다. 김 전 민정수석이 수첩에 적은 長은 김 전 실장의 지시를 표시한 것으로 보여 더 강한 개연성을 보여준다. 박영수 특검은 이에 근거해 문화예술인 지원배제 지시 등 각종 직권남용 정황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실장은 '허위증언' 혐의와 관련해선 법리적 요건이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 등에 관한 법 상 위증죄는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해서가 아니라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알면서도 고의로 증언해야 죄가 성립한다는 취지다.

김 전 실장은 "오래돼서 기억이 안났다. 나이가 들어 며칠 전도 기억이 안나는데"라면서 "그 뒤 신동철 전 국민 소통비서관 수사기록을 보니 (블랙리스트) 문서를 첨부해 올려보낸 일이 있다고 한다. 청문회 때는 그런 문서가 있었는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청문회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명단은 세월호 참사 관련 정부 비판,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 지지 선언 등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9473명의 명단이었다며 블랙리스트를 명단 별로 분리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그 당시 블랙리스트라 하는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만 여 명의 리스트가 맨날 나왔다. '그런 것 만든 적 없다'고 했다"면서 "청와대에 명단은 없었다. 분명히 본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비서실장 등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이행하지 않아 '괘씸죄'에 걸려 사직했다"는 진술을 하는 것에 대해 김 전 실장은 "세월호 사건 후 민심 수습 차원에서 7명 정도 대폭 개각이 이뤄졌고 그만두는 장관에게 일일이 사전 통보를 했다"고 반박했다.

블랙리스트 집행에 소극적이었던 문체부 1급 공무원 사직을 강요한 혐의와 관련, 그는 "문체부 1급이 몇 명인지, 성과 이름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일을 시킨 적도, 보고 받은 일도 없다"면서 "고위공무원이 일을 잘하는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에 시키면 다음날 보고가 들어온다. 전혀 그런 일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김 전 실장 변호인단은 지원배제 명단이 "문화예술인들에게 지원되는 국가보조금을 어떤 특정 예술인이나 단체에 지원하는 것을 감축하거나 중단하는 그런 정책 시행한 것"이라며 "단지 청와대와 문체부 간 의견 교환 과정에서 작성되고 업데이트 된 업무 참고 자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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