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자진 사퇴함에 따라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특히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합병 전 수개월 간 삼성물산 주식을 팔아치웠다가 합병을 발표한 이후엔 반대로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인 행위가 문제가 됐다. 1(제일모직) 대 0.35(삼성물산)라는 합병비율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삼성물산 주가를 낮게 유지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합병 전 이재용 일가는 제일모직 주식을 42.19% 보유한 반면, 삼성물산 주식은 1.41%(이건희)만 갖고 있었다. 삼성물산의 주식비율이 낮을수록 이재용 등 삼성일가에 유리하다. 이 때문에 삼성물산은 의도적인 실적부진을 기록하고, 국민연금은 합병 발표 전까지 주식을 대량매도하는 방식으로 주가를 낮게 유지했으라리는 “합리적 의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의심은 특검의 문형표 이사장에 대한 공소사실과 양사간 합병 주식매수가격결정 관련 서울고법 항소심 판결문에 상세히 제기돼 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측은 특검 수사가 들어가기 전에는 ‘건설업황 부진 등 삼성물산 주식 매도의 이유가 있었으며 합병 이후엔 시너지 효과 때문에 매수 이유가 있었다’고 해명했으나 특검의 압수수색 및 이사장 구속 수사 등 이후부터는 밝힐 게 없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16일 구속기소된 문형표 이사장의 공소장을 보면, 특검은 삼성물산이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하려 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질만한 정황이 있다고 밝혔다. 2015년 1월2일부터 그해 5월22일까지 삼성물산 외 다른 주요 건설사 주식의 주가가 17%~33%씩 상승한 것과 달리 삼성물산의 주가는 8.9% 하락했다. 특검은 이와 관련해 △삼성물산이 2015년 5월13일 카타르 복합화력발전소 공사(공사대금 약 2조원 규모)를 수주하고도 공시하지 않다가 합병 발표 시점 이후인 그해 7월28일 공시한 점 △2014년 말경부터 2015년 초경까지 사이에 삼성물산이 주관하던 공사 중 일부의 주관 업체가 ‘삼성엔지니어링(주)’로 변경됐다는 점을 그 배경으로 들었다.

▲ 구속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특검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구속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특검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특검은 이를 두고 “삼성그룹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을 유도하는 방법 등을 통해 삼성물산 주가를 낮게 유지”했다며 “이로써 이재용 등 삼성그룹 대주주 일가를 포함한 제일모직 주주에게 유리하고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비율이 나올 수 있는 합병 시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질만한 객관적인 정황이 다수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서울고법 민사5부(재판장 윤종구 부장판사)는 지난해 5월20일 구 삼성물산 주주 일성신약 등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매수가격 결정 청구 항소심 선고에서 이 같은 의도적 주가하락 가능성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구 삼성물산(주)’의 실적 부진도 주가의 상승을 막고 오히려 주가를 하락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며 “그러나 여러 언론과 증권사는 이건희 등의 이익을 위해 기업집단 ‘삼성’ 차원에서 구 삼성물산(주)의 실적 부진이 의도됐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위와 같은 의혹에 부합하는 객관적인 사실들도 일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구 삼성물산(주) 주가가 낮게 형성될수록 이건희 등의 이익이 커지고 △이건희 이재용 등이 구 삼성물산(주)의 경영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 등까지 감안할 때 “구 삼성물산(주)의 실적 부진이 이건희 등의 이익을 위하여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주식 매매 과정에도 재판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2015년 3월26일 구 삼성물산(주) 주식 중 11.43%(1784만8408주)를 보유했으나 지속적으로 주식을 팔아 이사회에서 합병을 결의(5월26일)하기 전 마지막 거래일인 그해 5월22일엔 9.54%(1490만6446주)로 지분율이 줄었다. 합병 발표 전까지 290만여 주를 팔아치운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구 삼성물산(주)의 3월26일 종가 기준 주가는 5만8600원이었으나 5월22일엔 5만5300원으로 3300원(5.63%) 하락했다. 반면, 국민연금공단의 제일모직(주) 주식 소유 비율은 2015년 3월31일 기준으로 5% 미만이었으나 6월30일엔 5.04%로 늘었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합병에 관한 이사회 결의일인 2015년 5월26일에 합병비율이 0.35(구 삼성물산) : 1(제일모직)로 결정된 후 구 삼성물산(주) 주가가 제일모직(주) 주가의 35%를 넘게 형성될 때가 있었다”며 “합병 법인의 지분을 계속 보유하려는 주주라면 이 기간에 상대적으로 주가가 오른 ‘구 삼성물산(주)’ 주식을 팔고, 상대적으로 주가가 떨어진 ‘구 제일모직(주)’ 주식을 매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투자 원칙에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국민연금공단은 반대로 구 삼성물산(주) 주식을 매수하고, 제일모직(주) 주식을 매도해 구 삼성물산(주) 주식 중 국민연금공단의 소유 비율을 늘려갔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이사회에서 합병을 결의하기 2개월 전 ‘구 삼성물산(주)’ 주식을 지속적으로 매도한 것을 두고 “이는 같은 기간 구 삼성물산(주) 주가를 하락시키거나 상승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재판부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사회 결의일(합병 발표) 후의 투자 행태”와 주주총회서 합병에 찬성하는 쪽으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감안할 때 “국민연금공단의 주식 매도가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구 삼성물산(주)의 주가는 합병 이사회 결의일 이전부터 이미 합병 계획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며 “또한 구 삼성물산(주) 주가의 상승 저지 또는 하락에 영향을 미친 실적 부진과 국민연금공단의 주식 매도가 그와 같은 주가 형성을 목표로 의도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정황들도 다수 있”다고 밝혔다.

다시말해 국민연금의 이 같은 주식매매는 삼성물산의 주가를 떨어뜨려 삼성물산-제일기획 합병안을 통과시키는데 도움을 주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 국민연금 홍보영상. 사진=국민연금 영상 갈무리
▲ 국민연금 홍보영상. 사진=국민연금 영상 갈무리
구창우 공적연금강화를 위한 국민행동 사무국장은 2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서울고법 판결이 나온 뒤인 지난해 6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의심스런 매도정황이 있다’고 항의했더니 당시 기금운용본부장(당시는 홍완선에서 강면욱 본부장으로 바뀐 상태였음)이 ‘내부 투자흐름을 살펴봤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어느 한 방향으로 투자가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며 “하지만 삼성물산이 실적 부진을 통해 주가를 떨어뜨리고 국민연금이 장단을 맞췄다는 의심은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구 국장은 “1대 0.35라는 지나치게 불합리한 합병비율 탓에 이 같은 의심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특검 수사가 시작되기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는 지난해 12월14일 내놓은 ‘보도참고자료’에서 국내 주식 매매는 직접 운용 외에 위탁한 운용사들이 위임을 받아 매매한 것이므로 공단이 관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공단은 삼성물산의 경우 합병 발표 전인 지난 2015년 5월까지는 업황 부진 등에서 비롯된 매도 동인이 있었으며, 합병 발표 후엔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 기대 등으로 인해 매수 유인이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공단은 “합병을 전후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매매는 다수 주체들의 재무적 판단으로 이뤄졌으며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입장이던 기금운용본부는 이사장이 구속기소돼 재판중인 현 상황에서는 답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대외소통팀 관계자는 2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수사진행 중인 사안이라 입장을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다”며 “지난해 12월21일 특검 수사가 시작돼 그 때부터 현재까지 수사 중인 상태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 전에 냈던 자료는 언론에서 제기됐던 것에 대해 당시 시점에서 말씀드리는 것이며, 특검이 수사에 착수한 이후엔 별다른 입장을 말씀드리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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