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8인 체제’로 들어서며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 시일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측이 ‘7인 체제’ 하의 탄핵 기각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결정을 더 늦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헌법재판관의 정족수 문제는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될 때부터 제기됐다. 박헌철 헌법재판소장의 임기가 1월31일,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오는 3월13일로 각각 만료됨에 따라 최악의 경우 재판관 7인이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 상황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1월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권한대행을 맡을 이정미 재판관과 악수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1월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권한대행을 맡을 이정미 재판관과 악수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의결 정족수가 적을수록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다. 헌법재판소법에 따르면 심판 정족수는 7인 이상이고 그 중 6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탄핵이 가결된다. 최소한의 기각 입장 재판관 수가 고정된다면 찬성 재판관 수를 5인으로만 줄여도 기각 결정을 도출할 수 있다. 가령 기각 입장을 채택하는 재판관이 3명 확보된다면 ‘8인 재판관 체제’부터 기각 결론을 내릴 수 있고 기각 입장이 2명 확보된다면 7인 체제부터 기각 결정이 가능하다.

박 헌재소장이 퇴임 직전까지 조속한 결론을 강조한 이유도 ‘7인 체제’를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헌재는 이례적으로 주3회 변론 기일을 지정하는 등 탄핵 심판에 속도를 내왔다. 박 헌재소장은 지난 25일 9차 변론기일에서 “3월13일까지 최종 결정이 선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오는 3월13일은 2011년 3월14일에 임기를 시작한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퇴임날이다. 자신의 퇴임 전 탄핵 심판 결론을 짓지 못한 상황에서 박 헌재소장이 ‘8인 체제’ 하에서 심판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탄핵 심판은 2월 말에서 3월 초에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25일 9차 변론기일을 마친 탄핵 재판은 오는 2월 1·7·9일 10~12차 변론기일을 예정해두고 있다.

12차 변론 기일 후 남은 증인 신문도 2월 셋째주 중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노승일 K스포츠재단 부장 및 박헌영 K스포츠재단 과장, 김형수 전 미르재단 이사장, 이기우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표, 김홍탁 더플레이그라운드 대표 등 남은 증인 5인 중 노승일 부장과 박헌영 과장은 2월9일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가 증인으로 출석하면 증인 채택에서 제외된다. 남은 3인의 증인 신문은 2월 9일 이후인 2월13일~17일 사이 완료될 수 있다.

헌재가 조속한 심판 의지를 보인다면 3월 첫째 주 내로 탄핵 결정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검찰·언론 정리” 언급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박 대통령

문제는 박 대통령 측의 재판 지연 시도다.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박 헌재소장이 탄핵 심판 결정 시한으로 3월13일을 언급한 데 대해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중대한 결심은 ‘대리인단 전원 사퇴’ 카드로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농단 게이트에 대해 억울하다며 '허황된 거짓말들'이라며 논란을 일축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25일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농단 게이트에 대해 억울하다며 '허황된 거짓말들'이라며 논란을 일축했다.

전원 사퇴 카드가 있음에도 심판 결론이 ‘3월13일’을 넘기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퇴 후 재판부가 조속히 국선 대리인단을 지정해 줌으로써 지연 시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김종보 변호사는 “촛불집회 등으로 나타난 국민적 여론, 사안의 중대성이 있는데 재판부도 재판 진행을 그렇게 늦추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퇴 후 일주일 내로 국선 대리인단을 지정하는 등 판단이 있을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진행이 어떻게 될 진 두고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탄핵 기각 가능성에 자신감을 드러낸 바 있다. 지난 25일 박 대통령과 인터뷰를 한 ‘정규재TV’ 진행자 정규재씨는 ‘박 대통령이 탄핵 기각 후 국민의 힘으로 언론과 검찰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이 정지됐음에도 지난 1월1일 기자간담회 형식을 차용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탄핵 사유를 정면 반박하기도 했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지난 23일엔 추가 증인 39명을 무더기로 신청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 중 29명을 기각했으나 추가된 증인 수만큼 변론 기일이 늘어나 재판 지연 시도라는 비판이 일었다.

▲ 31일 오전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퇴임식이 열리던 시간에 엄마부대 등 극우여성단체들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등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31일 오전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퇴임식이 열리던 시간에 엄마부대 등 극우여성단체들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등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박 대통령 측이 재판 지연 전략, 여론전 등 다양한 대응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대리인단 전원 사퇴 카드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종교계 인사는 “청와대 관계자가 보수인사들이 모이는 회합 자리 등에서 ‘헌법재판관 2인은 기각 결정을 할 것’이란 취지의 말을 하고 다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측의 ‘7인 체제 시나리오’를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헌재의 재판 진행 지휘가 관건… “심판 늦춰질 이유가 없어”

남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재판 진행 결정이다. 박 대통령 대리인단이 전원 사퇴 결단을 내린다해도 헌재의 대응 방향에 따라 8인 체제 하에서 심판 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월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주재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8차 변론기일이 진행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1월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주재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8차 변론기일이 진행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헌재는 탄핵 심판이 접수될 시기부터 조속한 심판 의지를 표명해왔다. 박한철 헌재소장은 지난해 12월30일 신년사를 통해 “탄핵심판 심리가 우리 헌정질서에서 갖는 중차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헌재는 오직 헌법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법절차에 따라 사안을 철저히 심사해 공정하고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헌재의 이같은 초심이 끝까지 유지될 지는 이정미 재판관의 지휘에 달리게 됐다. 이 재판관은 오는 2월1일부터 정식 권한대행이 선출되기 전까지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이 재판관은 현재 탄핵심판 절차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자는 각오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자신의 임기 내 결론을 지을 것으로 추측된다.

▲ 31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퇴임식에 참석한 이정미(뒷줄 여성) 재판관이 박 소장 뒤에 앉아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31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퇴임식에 참석한 이정미(뒷줄 여성) 재판관이 박 소장 뒤에 앉아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재판관 공석이 메워질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직무대행이 헌법재판관 임명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헌법은 대통령에게만 헌법재판관 임명권을 부여하고 있다. 헌법, 헌법재판소법 등은 이같은 대통령 직무 정지 상황 시 재판관 임명 절차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은 조속히 심판 결론을 내는 데 방점을 찍으면서 재판관 임명권과 관련된 입법조치 등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탄핵소추위원단은 탄핵심판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 20일 박 대통령의 탄핵 소추 사유를 헌법 위배 사항 중심으로 수정키로 했다. 5가지 헌법 위배 행위와 3가지 법률 위배행위로 구성된 기존 사유의 유·무죄 여부를 가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어 전체 사유를 헌법 조항 위배 범죄로 정리한다는 취지다.

반면 입법조치에 대한 필요성도 강조됐다. 박 헌재소장은 지난 25일 "헌법재판관 공석 생기지 않도록 입법조치 등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했다.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9일 보도자료에서 ”여야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박 소장 후임 지명·임명권, 이 재판관 후임 임명권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오는 2월 1일 10차 변론기일엔 김규현 외교안보수석, 유민봉 새누리당 의원, 모철민 주프랑스 대사 등 증인 3인의 신문이 예정돼있다. 오는 7일엔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3인이 헌재 증인신문을 받는다.

심판 기일 시점은 2월9일 즈음에야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조성민 전 더블루K 대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 및 류상영 부장은 12차 변론기일인 9일에 증인으로 출석한다. 고 전 이사가 출석하게 되면 노승일·박헌영 K스포츠재단 부장·과장이 증인 채택에서 배제돼 재판 속도가 더 빨라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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