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이든, 지는 쪽은 완전히 무너진다.”

2012년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파업이 100일을 넘어가던 무렵, 파업에 동참하진 않았지만 파업에 공감하고 있던 당시 MBC보직간부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그는 파업 장기전이 결국 MBC에 비극으로 돌아올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비극은 보도국 대체인력 투입으로 점화됐다. 당시 MBC사장 김재철씨는 30여명 안팎의 시용기자를 계약직으로 채용했고, 이듬해 퇴사 직전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뒤 MBC를 떠났다.

▲ 2012년 MBC파업 당시 조합원들이 김재철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 ⓒ이치열 기자
▲ 2012년 MBC파업 당시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의 모습. ⓒ이치열 기자
2012년 1월30일부터 7월17일까지, 겨울과 봄과 여름을 거친 170일 투쟁에 참여했던 MBC기자들은 파업으로부터 5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쓰러져갔을까. 안정된 고용조건, 강한 노동조합의 보호,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저널리즘 가치를 누려온 MBC기자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망 받는 언론인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파업에 참여했던 그 때 그 기자들은 오늘날 ‘죽은 노동’을 수행하는 가운데 ‘잉여적 존재’로 분류되는 것이 두려워 과거엔 경험하지 못했던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공정방송을 위해 싸웠던 MBC기자들이 김재철 체제 이후 무너져간 과정을 2012년 이후 전보·채용·승진·징계·교육 등 경영진의 인사관리(HR) 전반에서 발생한 노동자의 심리적·정서적 모멸 및 학대의 문제 차원에서 연구한 논문이 처음 등장했다. 논문 집필자는 파업에 참여했던 임명현 MBC기자다. 임 기자는 최근 성공회대 석사학위 논문 <2012년 파업 이후 공영방송 기자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관한 연구-MBC 사례를 중심으로>를 통해 MBC기자들의 ‘자기소외’를 분석했다.

경영진, 사법부 부당징계 판결 무시하고
부당전보→경력채용 반복하며 공포 형성

“희망이 없어졌다기보다는 희망을 믿지 않게 돼 버린 거지.” (MBC 파업참가기자)

MBC는 이명박정부에서 다섯 차례 파업을 벌였다. 언론장악에 맞선 투쟁의 최전선이었다. 그러나 2012년 170일 파업이 끝난 이후로는 파업에 나서지 못했다. 경영진은 대규모 해고와 정직, 대기발령 징계조치에 나섰고 경영진과 갈등을 겪는 조합원들에게 직종 전환 조치를 실시했다. MBC노조에 따르면 2012년 파업 이후 2016년 말까지 MBC 부당징계 피해자는 110여명 수준이었으며 파업 전후 노사 간 소송건수는 82건에 달했다. 이 중 노조 승소율은 82%였으며, 부당징계 건 승소율 94%였다.

▲ 2012년 MBC파업 당시 명동 거리에서의 퍼포먼스 모습. ⓒ이치열 기자
MBC는 경력사원을 대거 뽑아 보도국에 투입했다. MBC노조에 따르면 2013년 52명(2012년 시용기자의 정규직 전환 포함), 2014년 8명, 2015년 10명, 2016년(9월 기준) 12명을 채용했다. 모두 82명으로, 새로 보도국을 꾸린 것과 마찬가지의 규모다. 경영 등 다른 직군까지 합치면 파업 이후 경력직 채용인원은 229명에 달했다. 바꿔 말해 파업에 참여했던 MBC조합원 가운데 200여명 가량은 경력 사원에게 자리를 내줬다는 의미다.

끝없는 소송과 경력사원 채용은 2012년 이전의 MBC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제방식이었다. MBC노조가 김재철 사장 퇴진에 실패하며 노조의 투쟁동력이 악화되자 노사 간 힘의 균형이 깨졌고, 그 결과 MBC에선 군사정권시절을 방불케 하는 앙시엥 레짐(구체제)이 도래했다. 논문 저자인 임명현 기자는 이 같은 상황을 ‘비인격적(가학적) 인사관리’ 개념으로 분석했다. 비인격적 인사관리는 모멸감 주기, 과도한 업무 할당, 따돌림, 멀리 떨어진 곳으로의 업무 배치 등을 의미한다.

▲ 2012년 MBC파업 당시 조합원들의 모습. ⓒ이치열 기자
기자들은 어떻게 무너져갔을까. 파업 이후 보도본부에서 제외되는 방식으로 사실상 직종이 전환 된 기자들은 30~40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경인지사 ‣뉴미디어포맷개발센터 ‣신사업개발센터 ‣미래방송연구소 ‣매체전략국 ‣광고국 등으로 흗어져 신규 사업 개발, 뉴미디어 개발 등을 맡았다. 경인지사, 뉴미디어포맷개발센터, 신사업개발센터 등의 위치는 서울 상암동 MBC본사가 아닌 인천·수원·고양 등 수도권이나 여의도 부근이었다. 기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보도본부에 속한 파업참여기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들은 보도정보시스템 개발 및 관리, 뉴스사업, 컴퓨터그래픽 품질관리 등 보도지원 부서에 배치됐다. 파업 이전에는 이들 부서와 뉴스생산부서 간에 순환인사가 정기적으로 이뤄진 반면, 파업 이후에는 한번 이 부서에 배치되면 벗어나기가 어려워졌다. 논문에 따르면 이들까지 합산해 뉴스생산에서 실질적으로 제외된 기자들 규모를 집계하면 60명이 넘는다. 이 같은 상황에서 MBC기자사회는 보도그룹과 비 보도그룹으로 재구조화됐다.

논문에 따르면 보도본부 내에선 ‘뉴스데스크’를 제작하는 1그룹, ‘시사매거진2580’, ‘이브닝뉴스’ 등 보도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2그룹, 뉴스·보도프로그램을 제작할 순 없지만 보도본부 내에서 생산 업무를 간접 지원하는 3그룹이 있으며, 보도본부 밖에서는 상암동 본사 사옥에서 근무하는 4그룹, 본사 외부에 위치한 별도 사무실에 근무하는 5그룹, 마지막으로 해고된 6그룹이 위치하고 있다. 이 같은 재구조화 속에 비인격적 인사관리는 파업 참여자들 간의 연대감을 파괴했다.

▲ 상암동 MBC사옥. ⓒ이치열 기자
또 하나의 비인격적 인사관리는 ‘교육프로그램’을 통한 모멸감 주기였다. 서울MBC의 경우 파업 종료 이후 44명의 중징계자, 69명의 대기발령자가 발생했다. 징계자와 대기발령자, 업무 복귀자 일부는 2012년 하순부터 서울 송파구 신천동에 위치한 MBC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총 96명이었으며 교육기간은 3개월~8개월이었다. 기초 인문학 강좌, 요가, 브런치 만들기 등이 교육프로그램에 포함됐다. 교육대상자들은 전두환정권 삼청교육대를 빗대어 자신들의 교육장소를 ‘신천교육대’라 명명했다.

“신천까지 가서 허접한 강의를 듣고 있으면 한심스럽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하고 그런 감정 소모가 되게 힘들었지.” (MBC 파업참가기자)

파업 복귀 당시만 해도 그해 12월 정권교체를 기대하며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2014년 3월 김재철 체제 핵심인사였던 안광한 부사장이 사장에 오르며 희망은 꺾였고 불안은 길어졌다. 한 예능PD는 회사를 비판하는 웹툰을 그려 인터넷에 올렸다가 해고됐으며, 외부 매체와 인터뷰 도중 경영진을 비판했던 기자는 정직3개월 징계를 받았다. 정수장학회 도청의혹 관련 뉴스제작지시를 거부한 기자는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았다.

경영진의 각종 부당징계는 대부분 무효판결이 났다. 그럼에도 경영진은 징계를 이어갔다. 파업 이후 경영진과 갈등 과정에서 2명이 해고되고 23명이 정직 이상의 징계를 받았다. 부당전보 판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업참가 기자들을 전문성과 관계없는 부서로 발령 내고, 그들을 대신할 경력사원을 선발해 현업에 투입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전문채널을 통해 경력기자를 데려오기 쉬운 환경도 경영진에게 유리했다. 이런 가운데 매년 실시됐던 신입사원 채용은 단 한번만 시행됐다.

사법부 판단을 무시하는 경영진의 행태에 구성원들은 ‘고립’과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MBC노조에 따르면 MBC에서 파업 이후 징계, 대기발령, 교육발령, 무관 부서 전보 등 인사관리를 경험한 조합원은 165명이며, 이 중 91명은 여전히 본업에서 제외되어 있다. 직종별로는 기자 50여명, PD 30여명, 아나운서 10여명이다. 2016년 초 폭로된 백종문 녹취록에 따르면 녹음 당시 백종문 MBC편성제작본부장은 “회사를 망가뜨린 사람들이 50~80명”이라고 말했다.

▲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강제 직종 전환 현황. ⓒMBC노조
인사관리는 ‘당근과 채찍’으로 이어졌다. 보직 간부 인사도 파업에 불참했거나 참여 이후 노조를 탈퇴한 인물을 중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MBC노조가 파업 이후 4년 간 승진인사를 조사한 결과, 승진 대상자이면서 파업 이후 지난 4년 간 한 번도 승진하지 못한 직원 가운데 조합원의 비율은 70%를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1년에 두 차례 이뤄지는 성과평가에서도 2012년 이후 직종이 강제로 전환된 이들 가운데 저성과자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피케팅 참여’, ‘상급자와의 갈등’, ‘게시판 글 작성’ 등을 이유로 최하점을 받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 같은 인사관리를 두고 임명현 기자는 “파업 종료 후 저항 동력이 고갈된 노조의 힘을 완전히 빼고 노조의 경영 개입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분석했다. 실제 파업 참가 기자들의 노동현장에서의 저항은 원천 봉쇄됐다. 이는 사실상 퇴직을 유도하는 행위였다. 공정방송파업의 얼굴이었던 문지애 아나운서는 MBC 퇴사 이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파업이 끝난 이후 내가 회사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됐더라”라고 털어놨다.

▲ 문지애 전 MBC아나운서.
‘도구적 존재’ 거부하면 ‘잉여적 존재’ 퇴출압박
파업참가기자 ↔ 시용·경력기자 노노갈등 격화

“파업 직후에는 여러 명이 쫓겨나고 여러 명이 복귀하고 그랬으니까 그래도 우리가 같이 피해를 당하고 같이 버틴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소규모로 찍혀서 나가기 시작하자 심적으로 무너지더라. 이게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 혼자 버텨내야 될 문제가 된 것 같고….” (MBC 파업참가기자)

“출고된 기사 보고 이게 뭐냐. 처음에 쓴 거랑 완전히 딴판이 됐으니까. 그래서 나는 못 읽는다 이거…. 근데 부장이 그랬어요 그냥 읽으라고. 따로 불러서 건방지다는 듯이 얘기하고 그랬어요.”(MBC 파업참가기자)

“한참 기사를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이 붙었고, 기사 작성을 하는데 갑자기 뉴스시스템에서 로그아웃이 된 거에요. 그때 엄청 충격 받았죠.…나중에 짐 싸서 나오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MBC 파업참가기자)

논문에 담긴 22명 MBC기자들의 심층인터뷰를 종합하면 고통은 개별화됐다. 경영진은 기자들을 잉여적 주체로 배제하며 체제의 질서와 규칙을 강화했다. 저널리즘 주체성이 사라진 ‘도구적 주체’ 역할을 거부하면 기자는 곧바로 ‘잉여적 주체’로 밀려났다. 그의 자리는 곧바로 새 경력기자로 채워졌다. 한 번 쫓겨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배제는 조직을 운영하는 새로운 규칙이자 현재 MBC 체제를 규정하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취재보도 업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해온 기자들은 잉여적 주체가 되는 순간 노동의 수단을 잃어버렸다. 여기서 다시 백종문 녹취록을 곱씹어보자.

▲ 2012년 MBC파업 당시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아나운서협회의 기자회견 모습. ⓒ이치열 기자
“지금은 거의 뭐 바람 방향으로 바람이 세게 불고 있으니까 잠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또 올라올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좀 사람을 키우고 준비를 해야 된다는 큰 명제를 가지고…(중략) 경력사원도 뽑고 준비해야 되는데.” (백종문)

배제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MBC보도국의 체계적인 운영방식은 공포와 무력감을 낳았다. 임명현 기자는 “공포가 지속되며 기자 개인의 무력감이 확산되고 개인화를 강화해 저항적 실천은 소멸됐다. 연대감보다는 자기혐오가 늘어났다. 분노는 밖으로 향하지 않고 자신과 동료에게 향했다”고 지적했다.

파업에 참여했던 한 조합원은 노조를 원망했다. 그는 “노조는 우리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다. 170일까지 갔으면 어떻게든 끝을 봐야 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올라오고 나서 조합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파업에 참여했던 또 다른 조합원은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모멸감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게 너무 힘들다. 정신적으로 미쳐버릴 것 같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파업 참가 조합원들의 복잡한 심경은 논문에서도 드러났다.

“나는 5년 전부터 나가 있었어. 너무 힘들어. 근데 한 1년 나가 있던 애가 나한테 와 가지고 나 너무 힘들다 징징거려요. 그러면 만나고 싶지 않은 거지.”(MBC 파업참가기자)

“시간이 지나다보니 약간 무뎌진다고 해야 되나? 마치 가정폭력 피해자가 맞는 것에 둔감해진다는 것처럼. 회사가 휘두르는 폭력성에 내가 좀 둔감해지는 것 같아서….” (MBC 파업참가기자)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면,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거야.” (MBC 파업참가기자)

▲ 디자인=이우림 기자.
지난 5년은 파업참가기자와 시용·경력기자 간 노노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보도국 내부는 파업참가여부에 따라 구분 짓기가 이뤄졌고, 이질감을 느끼는 기자들은 일상적 대면 접촉 과정에서 서로를 혐오하게 됐다.

“끔찍했죠. 예상 이상이었어요. 엄청 차가웠기 때문에…야 쟤네한텐 인사하지 마 친하지마 선배라 하지 마…”(MBC 경력기자)

“밥을 먹는데 저희 경력들은 뒤에 따로 앉아 있어요. 근데 심지어, 음식을 먹는데, 밥을 시켜주지 않아요. 술도 권하지 않았어요. 부서장부터 구성원까지 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라는 생각을 하거든요.”(MBC 경력기자)

파업에 참여했다 복귀한 기자들 가운데 노조를 탈퇴하고 경영진과 적극 협력하는 기자들이 나타났다. 파업참가기자그룹은 시용·경력기자 그룹을 혐오했다. 비인간적 양태가 벌어졌다. 시용·경력기자들도 심리적 외상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파업참가기자그룹을 향한 역 혐오감정을 형성하게 됐다. 임 기자는 “서로에 대한 혐오는 도구적 주체로의 호명을 수용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의 성격 또한 없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으로 득을 보는 곳은 경영진이었다. 최기화 MBC보도국장이 민실위보고서를 찢어버리는 상황까지 오면서 내부에선 “그나마 노조가 망하지 않은 게 어디냐”는 체념 섞인 반응도 흘러나왔다.

JTBC 뉴스 보며 자괴감·부러움 느끼지만
‘저널리즘 실천’ 대신 ‘죽은 노동’ 받아들여

“(MBC뉴스는) 전혀 안 보지.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 일단.…아는 사람이 이상한 기사를 쓸 때 예를 들어 OOO이라든가. 그게 힘들더라고.”(MBC 파업참가기자)

기자들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는 상당했다. 기자들 가운데 누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엿듣고 위에 보고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아예 회사 근처 카페로의 발길을 끊었다. 누구는 MBC를 뉴스를 보지 않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리를 경력기자들이 대체했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 탓이었다. 이들은 JTBC 뉴스를 보면서 자괴감과 부러움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나라면 더 잘 할 수 있는데’ 같은 묘한 우월감과 시기심 등 중층적 감정이 혼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게티이미지
기자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2012년처럼 파업에 나서거나, MBC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다른 언론사로 이직하거나, 노조를 탈퇴해 경영진을 향한 유화적 행위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이들 ‘잉여적 주체’는 셋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임 기자는 MBC파업참가기자들이 “권력을 향해 분노를 외사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분노를 내사하면서 체제에 순응하려는 전략을 취했다”고 분석했다. 장기간의 탄압이 이어지자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임 기자는 “잉여적 기자 주체들은 생존의 토대가 되는 MBC 정규직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소극적 스노비즘(속물근성)에 근거하면서 불투명한 기대를 걸고 ‘저널리즘 실천의 유예’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저널리즘 실천의 유예’ 비용으로 ‘죽은 노동’을 받아들였다. 임명현 기자는 “2012년 노조 파업의 패배와 이후 경영진의 강력한 노동 통제의 성공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적 삶의 불안정해진 조건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저항하고 그러다가. 어차피 세상이 그런데. … 더 그냥 조용히 살아야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MBC 파업참가기자)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똑같은 거지. 사람이, 다 생계가 있는 사람들이고 가장이잖아.” (MBC 파업참가기자)

“저는 그냥 일만 하려고요. 생각을 해봤자 뭐 달라질 게 없잖아요 솔직히…기존에 있었던 선배들도 전부 다 지금 환경에 맞춰서 일하고 있잖아요.”(MBC 경력기자)

▲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MBC 마이크 로고를 떼고 방송하고 있는 MBC기자의 모습.
임 기자는 논문에서 “공영방송의 정권종속화 강화와 그에 따른 경영진의 비인격적 인사관리 기조 속에서 기자 주체는 잉여로 호명돼 뉴스의 외부로 격리되거나 도구로 호명돼 경영진이 주문하는 저널리즘 실천을 수행했다. 기자들은 기존의 저항적 실천 대신 자신의 저널리즘 실천을 유예했다. 이 같은 배경에는 모멸감과 공포, 수치심과 무력감 같은 집합심리가 자리하고 있다”고 결론 냈다. 

조직전체가 배제의 공포 속에 저널리즘을 유예하는 상황 속에서 모든 아이템 판단은 보도국 간부들에 의해 수직적으로 결정됐고, 결국 최순실게이트 국면에서의 ‘보도참사’로 이어졌다. 170일 파업 이후 5년은,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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