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이 “광화문 촛불에서 집단 지성의 힘을 확인했다”며 새해부터 ‘리셋코리아’를 주창했다. 리셋코리아는 “민심이 대안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중앙일보와 JTBC가 새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그룹차원의 대형프로젝트다. 이 같은 홍 회장의 행보를 두고 ‘킹메이커’로서 대선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홍 회장은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리셋코리아:내가 바꾸는 대한민국’ 행사 환영사에서 “광화문 광장의 촛불을 보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며 “어떻게 하면 촛불에서 확인된 민심이 하나로 모여 희망찬 나라가 다시 설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이 같은 발언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인식과 매우 대조적이다.

방상훈 사장은 지난해 12월21일 조우회 행사에서 “급진적 변혁은 사회 혼란과 국민의 고통을 불러올 뿐”이라며 촛불을 경계했다. 당시 방 사장은 “현재의 난국에서도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두 기둥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통일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홍석현 회장은 “‘이게 나라냐’ 하는 말이 어느새 유행어가 되었다.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며 “고민 끝에 작은 결론을 내리게 됐다. 바로 ‘리셋코리아’다. 나라의 기본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방 사장이 질서를 강조했다면, 홍 회장은 변화를 강조했다.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이치열 기자
▲ 1월 16일자 중앙일보 1면.
홍 회장은 ‘리셋코리아’를 위한 방법론적 대안으로 디지털 민주주의를 언급하며 “우리는 이미 광화문 촛불에서 집단 지성의 힘을 확인했다. 촛불의 에너지를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와서 시민이 국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중앙일보·JTBC는 올해부터 1000만 촛불에 담긴 시민의 열망을 담는다는 취지로 대국민 온라인 의견 수렴 SNS ‘시민마이크’를 내놨다. 시민들의 주장을 수렴해 팩트를 체크하고 어젠다를 세팅한 뒤 직접 제도를 바꾸는 식의 참여저널리즘을 지향하고 있다.

13일 행사는 시민마이크와 리셋코리아를 홍보하는 자리였다.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당일 행사를 두고 “우리사회 적폐를 해소하고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대해 전문가들과 뜻을 공유하는 자리였다”고 설명했으나 단순한 자리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개혁 프로젝트로 출범한 ‘리셋코리아’는 13개 분과를 설정하고 분과장까지 발표했다. 흡사 내각 발표 같은 분위기였다. 기업지배구조 분과장으로 삼성 세습경영 구조에 비판적인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을 임명한 점이 제일 눈에 띄었다. 운영위원 면면을 보면 고은 시인, 김호기 연세대 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송호근 서울대 교수, 전순옥 전 민주당 의원 등의 이름도 보였다.

▲ '시민마이크'를 홍보하고 있는 강지영 JTBC 아나운서. ⓒJTBC
홍 회장은 이날 행사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금수저, 흙수저 하며 좌절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한다”고 말한 뒤 “보수, 진보의 기득권 적폐도 깨야한다. 지긋지긋한 진영 논리도 깨야 한다. 패거리 문화가 남아 있는 한 진정한 사회 통합은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어 홍 회장은 “몇몇 지도자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아니라 온 시민이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며 “시민이 원하는 나라, 시민이 원하는 미래를 시민이 나서서 디자인해보자”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언론사 사주에 두고 있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해 그는 한반도포럼 고문으로 북·중 국경지대를 답사하고, 한국기원 총재로서 알파고에게 명예9단 인증서를 전달하는가하면, 민간싱크탱크 ‘여시재’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일련의 행보는 진보·보수 인사를 망라하는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홍 회장은 2005년 주미대사 시절 ‘홍석현 대망론’이 공공연하게 등장할 정도로 정치권의 관심을 모았다. 만약 그가 ‘삼성X파일’ 사건 없이 주미대사를 마치고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올랐다면 오늘날 반기문 대신 홍석현이 귀국환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대권에 관심이 있는지는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홍 회장이 지난해 12월 출간한 자신의 책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쌤앤파커스)에서 몇 가지 추론해볼 대목은 있다.

▲ 2005년 당시 홍석현 주미대사의 모습. ⓒ이창길 기자
홍 회장은 이 책에서 한·중·일 시대 대한민국이 새로운 도약을 이끌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며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리고 앞에서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적었다.

그는 또한 책에서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간 한국 회사들이 앞장서서 한국 문화를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이야말로 대중국 비즈니스의 전진기지로서 가장 매력적인 곳으로 만드는 게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며 코리안 드림과 매력국가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하나는 사회 통합이다. 책의 한 대목이다.

“이제 다 털어버리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면 어떨까요. 좌든 우든, 빨갱이든 친일파든, 아픈 갈등을 털어내고 뜨겁게 손 한번 잡아보자고요.”(267P)

이 책의 추천사는 노암 촘스키 MIT 교수,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이 썼다. 책 전반에서 외교능력과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은 중도성향 유권자로부터 ‘반기문의 대안’으로 떠올리게끔 만들기 충분하다. 보수성향 유권자에게는 삼성家출신에 친자본 재력가라는 사실이, 진보성향 유권자에게는 손석희를 영입해 JTBC로 박근혜와 부패권력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경쟁력이다.

중앙미디어그룹 내부에선 홍 회장의 대권설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회사 사정에 밝은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홍 회장의 리셋코리아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차원이다. 엘리트 출신의 홍 회장은 길거리에 파는 오뎅 한 번 먹어 본 적 없는 인물”이라며 “대선에 출마할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라 전했다. 만약 홍 회장이 직·간접적으로 대권에 개입할 의지가 있다면, JTBC와 중앙일보라는 ‘좌우의 날개’는 킹메이커로서 홍 회장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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